right_maket_banner.png
순복음홍성교회 라동옥 목사가 직접 농사지은 벌꿀판매
이태근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묵상
본교단 업무협약 업체 / 기하성회원 특별우대
홍영건장로
하나로의료재단
종교인과세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 (잠언 30:29~31) > 설교

본문 바로가기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 (잠언 30:29~31) > 설교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 (잠언 30:29~31)

노정호 목사 (임실순복음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18-10-10 14:50

본문

오순절 노정호.jpg29.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31.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상담학과목 수업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4.5와 5가 있었습니다. 4.5는 5보다 0.5작은 자신을 늘 의식해야만 했기 때문에 5앞에만 서면 늘 작아지고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5는 이런 4.5를 잘 알고 자신이 필요한대로 심부름도 시키고 야단을 치며 부하노릇을 제대로 시켰습니다. 4.5는 속으로는 구시렁대면서도 5의 모습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에 어떤 불만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4.5는 5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 했습니다. 심부름도 하지 않고 위협을 해도 코웃음을 치는 확연히 달라진 4.5의 변화가 궁금해진 5가 물었습니다. "야 너 왜 내 말을 안 듣니?" 4.5가 말했습니다. "나, 점을 뺏거든" 4.5가 점을 빼고 보니 45가 되어 5가 더 이상 커 보이지 않고 만만해 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나 가슴속에 점이 찍혀있는 사람들은 4.5처럼 자신이 45인 것을 모르고 5라는 세상의 환경에 주눅이 들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프리카 가나동화 ‘닭장속의 독수리’처럼 말이지요. 한 사람이 어린 독수리를 닭과 오리가 살고 있는 우리에 넣어 닭들과 같이 모이를 주어 수년간 키웠습니다. 독수리는 닭으로 학습되어 자신이 독수리임을 모르고 독수리의 용맹스러움과 자유를 부러워하는 닭장 안에 갇힌 닭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자신이 독수리임을 깨닫게 되어 하늘로 힘차게 날갯짓하여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닭장속의 독수리는 더 이상 우리 안에 갇힌 닭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하늘의 왕 독수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세 짐승과 왕과 같이 위풍당당하여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위풍당당하다는 것은 거리낌이 없고 의젓하여 위엄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두려워하거나 비굴해 하는 못난 행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주안에서 항상 가슴을 활짝 펴고 위풍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위풍당당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의 기쁨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자, 사냥개, 숫염소 그리고 왕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위풍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위풍당당한 신앙인이 되려면 사자와 같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으로 두려워함이 없이 언제나 위풍당당합니다. 사자가 으르렁 거리면 짐승들은 오금을 펴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자는 물러서가나 도망치는 법이 없습니다.(사31:4 참고) 이렇게 사자는 언제나 위풍이 있고 모든 짐승들을 압도하는 당당함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자는 그 어떤 짐승도 두려워하지 않는 위풍당당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도 사자와 같이 담대한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윗의 담대한 믿음을 보십시오. 소년의 때에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나운 들짐승과 싸워 이깁니다. 블레셋의 장사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맞서 승리한 다윗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당함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여자의 몸으로 동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아하수에로 왕 앞에 당당히 나타나서 구원을 호소한 에스더와 같은 담대한 믿음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상숭배의 강요가운데서도 담대하게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 위풍당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장 16~18절) 결국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머리카락 하난 상하지 않고 얼굴도 그을리지 않고 그을린 냄새도 없이 건져졌으며, 오히려 왕으로부터 더욱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사자와 같이 강하고 담대함으로 당당하고 위품있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인이 되려면 사냥개와 같이 주인을 의지해야 합니다.
잘 길들여진 사냥개는 정말로 용감하고 위풍이 당당합니다. 특히 주인과 함께 있으면 사냥개의 기세는 아무도 당하지 못합니다. 이 같이 잘 길들여진 사냥개들이 자신보다 강한 맹수들을 만나도 꽁무니를 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덤벼드는 당당함이 있는데 이 기세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사냥개의 위세당당한기백의 근원은 주인입니다. 주인과 함께 있으면 걱정 없으니 주인이 명령하면 무조건 덤벼들도록 훈련되고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혹여 생명의 위험에 몰리더라도 사냥개 뒤에 주인의 총 한방으로 어떠한 대상이라도 쓰러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냥개는 어떤 사냥 대상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맹공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냥개는 자기의 주인을 의지하는 믿는 믿음이 사냥개의 당당한 기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냥개의 모습을 통해 오직 주인을 의지하여 맹수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하는 기백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에서 다윗의 고백을 함께 보기 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4~6)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지켜주시고 싸워주셔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인이 되려면 숫염소와 같이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야생의 숫염소는 사람이나 맹수들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험산준령 기암절벽이 자기들의 생존영역입니다. 숫염소는 험한 산 기암절벽에서도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또 저 바위에서 이 바위로 너무나도 잘 움직이고 뛰어 다닙니다.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서 말이죠. 또한 숫염소의 뿔은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자기의 뿔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서로 부딪쳐 뿔을 강하게 만들고, 상대가 없을 때는 바위에 부딪쳐서라도 뿔을 강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숫염소는 험산준령과 기암절벽을 맹수들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버리며,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우뚝 서서 자신을 노리는 환경이나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 아래를 살피고 유유히 돌아다니는 숫염소에게서 위풍당당함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서 신선한 약초와 풀을 유유히 뜯어 먹는 숫염소의 모습을 보면 고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숫염소의 당당한 위세와 기백은 속세의 짐승들과는 완전히 구별됨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위세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의 죄 된 것들을 끊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저절로 세상과 구별된, 다른 사람이 그냥 보기만 해도 뭔가 다른 위세와 당당한 풍모를 지니게 되는 것이며, 깊고 고상한 기품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숫염소가 기암절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당당한 위세와 기백으로 세상을 살아가시는 거룩한 영성을 소유하신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이니 되려면 왕 같이 자신의 신분을 회복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왕이라고 해서 다 위세가 있고 당당한 것은 아닙니다. 잠언 본문에서 말하는 왕은 특별한 왕을 말합니다. 위엄이 지극하고 당당한 그런 왕을 말합니다.
그러면 왕의 위엄과 위풍 그리고 권세가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은 왕으로써 그 위세가 대단했습니다. 열방의 왕들이 찾아와 화평을 구했을 뿐 아니라 조공을 자원해서 바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또한 왕 같이 위풍당당한 신분을 가진 자 입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같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분은 택함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엄청난 신분을 부여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작은예수로써 성취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택함 받은 자녀,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에 합당한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며 공의와 진리를 나타냄으로 그 위엄을 드러내는 위풍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자기 가슴속의 OOO이라는 큰 점을 빼지 못하고, 세상의 평가에 온 신경이 집중돼 남이 자신을 평가하는 평가에 흔들리고 평생 자신의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휘둘림에 흔들리며 사는 노예로 살아가기를 바라시지 않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는 세상의 왜곡된(잘못된) 진리와 유혹에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 근심, 낙망하며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참 진리 안에 서서 우리를 두렵게 하고 절망하게 하며 낙심하게 하는 악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우리는 더욱더 강하고 담대하게 맞서 승리하는 위풍당당함을 지닌 신앙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이 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소개구독안내광고안내고충처리안개인정보취금안내 및 이용약관홈페이지 제작안내공지사항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04649 / 등록일 : 2017년 08월 07일
발행인 : 양재철 목사 / 편집인 : 송시웅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로 81길 22-26(상계동) / TEL: (02) 720-6839 Fax: (02) 720-7724 / 발행일 2005년 03월 02일
청소년보호 책임자 : 이은정 (02) 720-6839
Copyright ⓒ 2017 기하성총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