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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고정 (히 11:27)

이재웅 목사(충남2지방회장, 순복음신금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3-10-18 10:54

본문

이재웅 목사.jpg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려는 잘못을 범합니다. 참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이 믿음이라고 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모세가 일평생 그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고정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의 생애를 풀이하기를 우리의 고정화된 생각과는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표현으로 모세의 생애 120년 모두가 자신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고 살았던 생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전 생애, 120년 모두가 믿음으로 시선을 주님께 향한 것이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모세의 생애 가운데 두 번째 40년을 기록한 27절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모세는 애굽을 떠났고,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였음이 왜 믿음의 행위였습니까? 


1.  부르심에 응답하게 됩니다. 

 

히 11:27절 상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모세의 자기 민족을 향한 사랑은 남다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루는 고역에 시달리는 히브리 백성을 돌아보다가 그들을 매질하는 애굽 사람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라 여겼습니다. 아마 민족을 위해 일했다는 만족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튿날 밖에 나갔는데 자신의 민족,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를 말리는데 싸우던 한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일로 모세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자신을 죽이고자 찾는다는 소리에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된 이 기사에서, 모세가 애굽을 떠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에 대한 두려움에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행위라고 하였을까요?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왜 모세가 애굽을 떠남이 믿음의 행위였다고 했습니까?

 

출애굽기 2장의 문장을 잘 살펴보면 모세가 자신의 범죄가 발각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인 것이 발각되어 두려운 것은 기록되어 있고, 바로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 두려움에 도망쳤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즉 그 두려움 때문에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내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난 것”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모세는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애굽을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장성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 스스로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난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였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가슴에 새기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물론 원인은 두려움에서 출발하였지만 결코 두려움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절묘하게 살인사건과 겹치기는 했지만 떠나야 할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자신이 떠나야 함을 알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얻기 위하여 결단하고 광야를 선택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모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찾았을 것입니다. 40년을 왕궁에서 자랐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야 합니다. 가야 할 때 가야 합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달려가야 합니다. 사명 감당해야 할 때 해야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로 떠나감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장소입니다. 깊은 교제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오늘 이 시간 세상의 근심과 걱정을 다 내려놓고 이 자리에 나오셨다면 이곳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광야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담대하게 됩니다. 

 

모세는 자기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의 감정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운 감정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그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모세는 믿음으로 자기가 애굽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히 11:27 중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그는 바로가 군사들을 보내서 자기를 추격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광야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바로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해결하는 길은 믿음뿐인 것입니다.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간 곳이 광야였습니다. 즉 광야는 도망자들의 마지막 도피처이지만 믿음이 있는 모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광야행은 실패와 좌절로 얼룩진 도피가 아니라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무서운 감정을 극복하고 담대한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 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 개혁자였던 존 낙스의 무덤에는 이러한 묘비가 써 있습니다. “여기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자가 누워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 연약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왕의 노함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했던 모세의 믿음,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다윗의 믿음이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인내하게 됩니다.

 

히 11:27 하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여기서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뜻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40년을 매일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참아냈다는 것입니다. 인내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간 광야에서 그토록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일하심을 기다렸건만 그 세월이 40년이나 흘렀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해지고 아예 들리지 않으면 포기해도 진작 포기했을 시간이 40년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40년 동안, 세미한 음성, 희미한 음성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단하여 광야로 왔건만, 광야로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고 그래서 히브리 민족으로서 비전을 더 확실하게 보여 주실 줄 알았는데 야속하게도 40년 세월만 흐르고 만 것입니다. 

 

모세의 광야 40년은 허송세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린 인고의 세월이었습니다. 변함없이 기다리고 기다린 세월이었습니다. 

 

히 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오래 참아 내는 자의 것이 됩니다. 기도하는 순간 모든 것이 쉽게, 또는 당장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지금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교회를 나서는 순간 기도하는 대로 모든 것이 변화 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상황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지독하게 우리를 테스트 하십니다. 우리의 심령 밑바닥까지, 모두 드러내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오래 참아낼 수 있는가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참고 기다리며 부르짖는 사람에 대하여,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올리시고 견고한 터에 세우십니다. 

 

시40:1 ~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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