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행 2:37~41)
소명숙 목사(덕양지방회장, 성사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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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11-02 13:29본문
오늘 본문은 마가다락방에 요엘을 통해 약속한 성령이 임하고 바로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그 완악한 사람들이 돌이키고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이들은 조상대대로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고 하나님 외에 어떤 신도 거부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를 죽인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갈릴리 어부인 베드로의 설교 한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고민도 없이 그날에 침례까지 받습니다. 그 당시 인구를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하나님 외 어떤 신도 용납하지 않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면서 목숨처럼 지켜낸 자신들의 종교를 어떻게 한순간에 버릴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다른 제자가 아닌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말입니다.
제자들 중 자칭 서열 1위였던 그는 예수가 잡히시던 밤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해서는 안 될 씻지 못할 죄를 짓고 고향으로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신의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인데 이 무식하고 충동적이고 배신자인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예루살렘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분명 하나님 외에 다른 신, 또 유대인의 왕, 또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헐고 3일만에 다시 짓겠다는 허무맹랑한 참람한 죄를 짓던 죄인이었는데, 그 예수가 죽는 순간 민족의 심장인 성전 안 지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지성소가 드러나는 사건이 생기고 지진이 일어나고 죽은 자들의 무덤이 열리는 사건들이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분명 로마 병정이 죽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다시 살아나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들이 점점 퍼져 나갑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고 그 핏값과 저주는 우리와 우리 후손이 받겠다고 소리쳤는데, 그 예수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는 순간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 전율이 임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예루살렘은 메시야를 죽인 형벌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언제 임할는지 하나님께 버림받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탄식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돌이킬 방법도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 독생자를 죽였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에 예루살렘에 다시 찬송과 기도가 회복되기를 원하셨고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다시 살 길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어부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어떤 내용 이었을까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며 제자 삼으시고 일거수일투족을 보시고 하늘의 귀신 쫓는 권세, 말씀 전할 권세, 병고칠 권세 등 놀라운 권세와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시고 디베랴 바닷가를 찾아오셨습니다. 어떤 제자들보다 예수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연약한 베드로, 그런 그를 예수님은 너무나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오신 예수님을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버림받아 마땅한 자를 디베랴 바닷가에 찾아오셔서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 사도의 직분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시 돌아왔고 살 길을 찾았으며 회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설교를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버림 받았던 자, 예수님을 부인했던 엄청난 죄를 지었던 죄인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의인들이 설교를 했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가 기울여지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들의 죄악이 더 무서웠고 죄가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과의 거리감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다는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이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 안에는 우리와 같이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했던 죄인이 있었습니다. 이 죄인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할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다시 돌아올 방법이 있고 회복할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기에 하루에 삼천 명씩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 세 번씩 예수를 부인한 미련한 자도 들어 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며 좌절하기도 합니다.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울 것이 없는 어리석은 자라고 연약함만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세상의 죄인들을 부르시고 아프고 병들고 고난받고 흑암에 있는 자들을 건져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부끄럽고 수많은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를 오늘도 불러내셔서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과거의 죄에 묶여 좌절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아시고 불러내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나약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끌어내셔서 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살려내십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산 소망과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고 이 세상을 승리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깨끗하고 정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존귀한 자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능력자로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내십니다.
우리의 허물, 죄, 연약함과 부끄러움을 통하여서 이러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용납하기를 바라며 살리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이 자부심과 긍지가 베드로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모습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부인한 자라 할지라도, 오네시모와 같은 종일지라도, 빌레몬과 같은 부자도 바울과 같이 학벌과 지식이 있는 자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 부끄러움이 하나님 앞에 있기에 그것이 변하여 우리의 능력이 될 수 있고 그 부족함이 바뀌어 긍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들, 용서받은 죄 때문에 날마다 모든 죄인을 용납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도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삼천 명 회개는 다른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같은 제자인데 조금 억울하고 속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욕하고 저주한 자를 디베랴 바닷가까지 직접 찾아가셔서 격려하시고 내 양을 치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찾지 못하고 울부짖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아셨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먼저 아셨기에 그들을 통해 세계 복음화를 이루시기를 원하셨는데 인격적으로 흠이 많고 예수님 앞에 짓지 말아야 할 죄를 지은 베드로가 적격자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었고 목숨을 걸고라도 복음을 전하고 자신이 감옥에 가면서까지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의 가슴에 예수님을 부인하여 남은 주홍글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가슴마다 달려있던 예수를 죽였다는 주홍글씨의 명패를 걷어내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이렇게 존귀하게 된 자가 베드로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바티칸 성당이 실질적으로는 베드로의 무덤입니다. 이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떠난 세계의 영웅호걸에게도 없는 왕국이 된 그곳이 베드로가 있는 곳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권세, 죽은 자도 살려내는 놀라운 권세를 하나님은 부어 주셨습니다. 갈릴리 어부로 보잘 것 없고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존귀한 자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권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고 살아있는 사람도 죽으라면 죽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만큼 권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제자 중 인격적인 사람은 더 많았고 욕심 많았던 요한, 점잖고 온유한 안드레와 같은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주를 위해 살았고 순교했지만, 허물 많고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를 갖고 있는 자라도 하나님께서는 들어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감격스럽게 다가온다면 그 사랑을 갖고 세상에 나가 전할 때 삼천 명이 아닌 삼만 명, 삼십만 명도 변화되는 기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 지금 이 시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간절히 전하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 것인가를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피차 예수님을 못 박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존귀한 자로 불러내시고 존귀한 사명 주시고 존귀한 성도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오늘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도 자신의 과거를 보며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정죄 속에 갇혀 진정한 구원 받은 자로서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용서받은 의인으로서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이 용서하셨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다면 주님의 사랑을 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과 허물, 부끄러움 조차도 완전한 용서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정죄에서 빨리 벗어 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모든 분들은 과거가 아닌 오늘, 또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주님의 용서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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