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요 21:18~23)
이창희 목사(대전서지방회장, 순복음제일좋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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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7-06 09:47본문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공일까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성공하기를 희망하고 각자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공’이라는 말 뒤에는 ‘물질적 부요’와 ‘명예’ 그리고 ‘영광’이라는 개념들이 따라다닙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들이 따라 줄 때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적 부요’와 ‘명예’ 그리고 ‘영광’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이 충족될 때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석유재벌 ‘록펠러’는 그 모든 것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귀병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 행복할 수 있었고 세상을 섬기는 변화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물질적 부요’와 ‘명예’ 그리고 ‘영광’ 이런 것들이 인생이 궁극적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고, 축복받는 길이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적지 않은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적인 삶’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일치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갈등과 고민입니다. ‘물질적 부요’와 ‘명예’ 그리고 ‘영광’ 이와 같은 것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과 항상 일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거기에는 갈등 될 것도 고민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찾아온 갈등과 고민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나섰을 때 그는 누구 못지않게 ‘성공적인 삶’을 꿈꾸며 그 길을 택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성공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물질적 부요’와 ‘명예’ 그리고 ‘영광’이 뒤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면 그 우편에 앉아서 권세를 휘두르며 세상을 통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수제자를 자처하며 나섰습니다. 유월절 식사를 나누는 다락방에서 ‘너희가 이 밤에 모두가 나를 버리고 도망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모두가 주를 버리고 도망할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까지 했습니다. 주님과 고난도 함께 받고 그 영광도 함께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에게 체포되어 끌려갔고 베드로는 도망쳤습니다. 급기야는 대제사장의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저주하며 부인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성공자의 삶’을 살겠다는 모든 꿈을 접고 옛 생업인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물음은 과거 베드로의 실패를 생각나게 하는 물음입니다.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단코 도망하지 아니하며 생사를 주님과 함께하겠다고 고백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던 과거의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의 상처를 들추어 다시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에게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고백을 듣고 그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주님을 부인함으로 과거에 잃어버렸던 권위까지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베드로에게 그의 미래의 삶이 어떠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절). 오늘 이 예언의 말씀은 베드로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 상반절에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예언의 말씀을 베드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주님의 예언적 말씀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초창기에 그가 꿈꾸었던 ‘성공적인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의 미래는 분명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인 것은 맞지만 그가 꿈꾸었던 ‘성공적인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이제 자연스럽게 ‘요한’을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요한은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유일한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순교하고 싶었지만 그 순교에서 제외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베드로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요한의 미래’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주목하며 그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20-21절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0-21).
그러자 주님께서 22절에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절).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 갖지 말고, 그의 삶과 너의 삶을 비교하려 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은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저와 여러분! 우리가 꿈꿔야 하는 삶은 ‘성공적인 삶’이 아닙니다.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 바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입니다. 이 삶이 이 땅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이고, 저 하늘에 상급을 쌓는 삶이며, 진정한 인생 성공을 가져다주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할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아야지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위로를 찾고 행복을 찾아야지 결코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의 삶을 견주며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께서는 요한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 말씀을 정리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이 말하는 ‘성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명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면서 ‘성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면 우리는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공자라고 생각하는 ‘아브라함’, ‘이삭’, ‘요셉’, ‘다윗’ 등 신앙의 위인들은 모두 하나같이 ‘사명자’로 살아간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공’을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사명’을 쫓아갔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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