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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 있지 말아야 할 곳” (요한1서 3장 13~14절)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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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 있지 말아야 할 곳” (요한1서 3장 13~14절)

이장균 목사(교단 부총회장, 순복음강남교회)

페이지 정보

26-05-13 08:22

본문

이장균 목사.jpg

1. 엘라 골짜기에 머물러 있지 말자.  


1)엘라 골짜기는 어떤 골짜기인가? 

엘라 골짜기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족속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진치고 있던 골짜기였다(삼상 17:2-3). 문제는 사울 왕이 지휘하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엘라 골짜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엘라 골짜기 맞은편 블레셋 군사들 사이에 골리앗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골리앗이 무섭고 두려워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대는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골리앗 앞에서 무력했던 것은 왕이었던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골리앗은 무력감에 빠진 이스라엘 진영을 향하여 조롱하고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려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골이 장대한 골리앗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2)우리도 살면서 때로는 엘라 골짜기에 머물러 있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문제가 골리앗과 같이 커서 상대할 엄두를 못 낼 때가 있다. 문제 앞에서 자기 자신이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엘라 골짜기에 머물러 일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엘라 골짜기를 박차고 일어나 골리앗을 물리치고 엘라 골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엘라 골짜기에서 벗어나려면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 사울 왕과 이스라엘 병사들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였다(삼상 17:10~11). 전쟁터에서 두려움은 적보다 무서운 적이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인가? 그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 보다 더 큰가? 두려움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다. 두려움은 누가 대신 해결해 주지 못한다. 두려움은 내가 해결해야할 문제다. 두려움에 빠져 살지 말아야 한다. 


3)소년 목동 다윗.  

엘라 골짜기로 내려가 골리앗과 마주선 사람은 소년 목동 다윗이었다.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기가 차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오금이 저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눈썹도 까닥하지 않고 물매를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골리앗은 순식간에 쓰러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뭐지?’. 골리앗은 칼과 창과 방패를 가지고 싸우는 근접전을 예상하고 다윗을 상대하려고 했지만 다윗은 골리앗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투석전으로 골리앗을 한 방에 보내 버렸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원이다. 차이 나는 삶을 살려고 하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차원의 다른 삶을 살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다. 

 

믿음이란 세상과 차이 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살아가는가? 믿음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살아가는가?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이야기다. 당시 독일의 고학생들은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곤 했다. 노래가 엉망일 경우나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쫓겨날 수 있었다.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냅다 뛰어나오는 것이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자기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쳤지만 붙잡히고 말았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돈 뭉치를 내밀었다. 루터가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열등의식 속에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면서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갈아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고백했다. 두려움의 엘라 골짜기를 믿음으로 벗어나야 한다.


2. 낙심의 항구에 머물러 있지 말자. 


1)갈릴리는 바다가 아니다. 

성경에서는 갈릴리를 ‘갈릴리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디베리야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게네사렛 호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바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유대인들은 물이 많이 고여 있는 것을 보면 바다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갈릴리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민물호수다. 길이는 21km, 넓이는 13km, 가장 깊은 호수의 수심은 44m다. 갈릴리 호숫가에는 수십 종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 

 

베드로는 이곳에서 어부의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어느 하루, 고기를 잡으러 나갔지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항구로 돌아와 그물을 씻고 있는데 누군가 와서 배에 오르더니 육지에서 조금 떼라고 하시더니 배 안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셨다. 베드로는 누군가 올라와 자기 배를 이용했을 때, 임대료라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2)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에 모시기 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베드로는 생업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생활도 이럴 때가 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얻어지는 것이 없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포기하고 말아야 할 것인가? 

 

베드로는 어떻게 하였나? 고기잡이를 포기하였나? 타던 배를 팔아 버렸나? 물고기 잡던 그물을 태워 버렸나?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가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었다. 그물을 씻고 손질하고 있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생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오르신 배는 배 주인이 그물을 씻고 손질하고 있었던 배였다. 실패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으면 결국 열매를 거둔다.  

 

제일 편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편하기는 하지만 평생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배가 항구에 있으면 안전하다. 그러나 배를 만든 이유는 항구에 묶어 두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바다로 나가라고 만든 것이다. 항구에 있는 배는 존재 이유가 없는 배다. 


3)예수님을 모시고 바다로 나아가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졌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다. ‘낙심의 항구’에 머물러 있지 말자. ‘염려의 항구’에 머물러 있지 말자. ‘근심의 항구’에 머물러 있지 말자. 낙심이 다가오고 근심이 다가오고 염려가 파도처럼 다가올 때 항구로 도망가지 말고, 예수님을 모시고 응답의 바다로 나가자. 

 

중동전쟁의 여파가 체감되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들은 기름값 인상을 체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물가 상승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국민들 뿐 아니라 모든 산업체가 원료 구입에 애를 먹고 있다. 들려오는 소식들마다 염려와 걱정이 앞을 다툰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세계적인 질서가 흔들리면서 전 세계 사람들 마음마다 낙심이 파도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문제가 다가오면 문제를 치워달라고 기도하자. 문제를 이길 믿음과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 태산과 같은 문제가 사라진다고 다른 문제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태산이 사라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보다 ‘태산을 넘어갈 수 있는 힘과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먼저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낙심을 벗어 던지고 주님과 함께 세상을 이겨나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자(요일 5:4~5).   


3. 슬픔과 상처에 머물러 있지 말자.  


1)신앙생활은 기뻐야 한다.

인상 쓰며 신앙 생활하는가? 인상 피며 신앙 활하는가? 눈물 흘리며 신앙 생활하는가? 웃으면서 신앙 생활하는가? 

 

잘 아는 사람이 응급실에 있어서 다녀왔다. 응급실에 있는데 옆 병상에 누워 있는 여성이 있었다. 의사선생님이 집에 가셔도 된다고 하는데 이 여성은 집에 안 간다고 입원시켜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집에 가서 또 아프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이제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내가 옆에 있잖니” 하시는데도 아니라고 “아프다고 앞으로 아플 것”이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 2:25~27). 신앙생활하면서 우리 마음도 기쁘고 우리 혀도 즐거워야 한다. 


2)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상처에 머물러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슬픔의 상처가 떠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다. 몇 살인가? 산 나이만큼이나 마음에 상처가 있다. 나이가 오십이면 마음의 상처가 오십 가지는 된다. 나이만큼 상처가 있다. 한 살 때 받은 상처, 두 살 때 받은 상처, 세 살 때 받은 상처, 열 살 때 받은 상처, 스무 살에 받은 상처, 결혼하기 전에 받은 상처, 결혼 후에 받은 상처 등등 그 상처가 그대로 마음에 담겨 있다가 어느 한 순간에 탁하고 터져 나와 발목을 잡는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상처를 싸매시는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1~3).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가? 슬픔을 주시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사단과 마귀는 슬픔을 틈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한다. 슬픔의 상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주님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슬픔에 빠져 있지 말자. 기뻐하며 또 기뻐하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야훼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우리는 엘라 골짜기에 머물러 있지 말자. 낙심의 항구에 머물러 있지 말자. 슬픔의 상처에 머물러 있지 말자.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   

총회 화요기도회(2026.4.21.)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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