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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능력을 회복하자 (사도행전 19장 1~7절)

정철주 목사(충청지역총연합회 부회장, 영동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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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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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주 목사.jpg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무겁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의 자리에 나와야 할 의무가 있고,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세상 속에서는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도덕적, 영적 의무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그 의무들이 여러분에게 정말 기쁨입니까? 아니면 혹시 나를 지치게 만드는 영적 노동은 아닙니까?

 

많은 성도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의 감격은 사라진 채, 껍데기만 남은 종교적 습관에 갇혀 고통스러워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격이 없고, 기도를 해도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낍니다. 죄와 싸워 이기고 싶지만 매번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 자신을 보며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영적 무기력증의 원인은 우리가 열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동력의 결핍’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라는 거대한 도시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제자’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했고, 나름대로 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을 분별하는 바울의 눈에는 그들의 치명적인 결핍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동감이 없었고, 세상을 뒤집어엎을 만한 하늘의 권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신앙 근저를 흔드는 아주 당혹스럽고도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오늘날 현대 교회의 문턱을 넘나드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교회에 다니느냐?” 혹은 “너희가 직분을 맡았느냐?”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본질, 즉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에너지원인 성령의 임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당황하며 대답합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이 대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령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내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통치자로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수많은 ‘이론적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입니다.

 

성령 충만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어떤 특별한 신비주의자들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기쁨’과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단 하루도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도의 권리인 동시에, 반드시 구하고 받아야 할 가장 거룩한 의무입니다. 우리는 이 에베소 제자들이 겪었던 영적 전환점을 통해, 어떻게 하면 우리도 메마른 신앙의 의무에서 벗어나 성령의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능력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바울의 이 질문이 여러분의 가슴을 때리고, 잠자던 여러분의 영혼을 깨우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회개’를 넘어 ‘능력’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분명 ‘제자’라 불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에서 떠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볼 때 그들의 신앙은 어딘가 공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요한의 세례’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3절).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즉,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결단’의 단계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수많은 결심을 합니다. “이제는 화내지 않겠다”, “정직하게 살겠다”, “기도 생활에 힘쓰겠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유혹의 태양이 뜨면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의 도덕적 결심만으로는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할 첫 번째 의무의 이유입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회개)을 가졌다면, 이제는 죄를 이길 힘(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요한의 세례가 ‘정화(Purification)’를 의미한다면, 성령 세례는 ‘부여(Empowerment)’를 의미합니다. 깨끗하게 씻겨진 그릇으로 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채워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죄를 이기는 것은 나의 의지력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법’ 즉 성령의 통치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멋진 스포츠카를 샀습니다. 그런데 이 차에 연료가 떨어져서 주유를 하기 위해 가다가 주유소를 100m 남겨두고 시동이 꺼졌습니다. 레커차를 부르기가 애매하여 그냥 밀고 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밀고 가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게 가십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기름이 떨어져 시동이 꺼져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령 없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율법이라는 차를 내 힘으로 밀고 가려니 신앙이 고통이 됩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시면 엔진에 불이 붙습니다. 그때부터 차는 나를 싣고 달려 나갑니다. 성령 충만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2. ‘나’가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전합니다. 요한이 증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임을 선포하자, 그들은 비로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5절). 이는 신앙의 중심축이 ‘나의 결단’에서 ‘예수의 주권’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을 뜨거운 감정이나 신비한 체험으로만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본질은 ‘지배권’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나의 명의를 예수님께 이전했다는 법적 선언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내 판단과 고집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손님처럼 대접하면 그분은 손님처럼 머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주인’으로 대접하면,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기 시작하십니다. 인격적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그분을 무시할 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성령님, 오늘도 내 생각과 입술과 행동을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통치’라고 합니다.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라 할지라도, 각자가 자기 실력만 믿고 마음대로 연주하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 됩니다. 연주자의 의무는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휘자가 작게 연주하라면 작게 하고, 멈추라면 멈추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지휘봉을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가득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휘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지휘에 나를 맡길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향곡이 됩니다.


3. ‘사명’을 ‘능력’으로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고 방언과 예언이 나타납니다(6절). 그리고 그 숫자가 ‘열두 사람쯤’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7절). 이는 성령 충만이 개인의 만족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사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에 나타난 방언과 예언은 단순한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방언은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는 통로가 되었고,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담대히 선포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를 ‘방구석 신앙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를 세상 한복판으로 밀어내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에베소라는 거대한 우상의 도시를 변화시킨 것은 대단한 전략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12명의 ‘변화된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지 않고, 직장이 복음화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압도할 성령의 권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증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세상은 숫자가 많아야 이긴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성령 충만한 소수에 의해 움직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전략’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 충만한 사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할 의무는 나 하나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가정과 일터, 공동체를 살려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작은 성냥불 하나만 켜져도 주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불이 옆 사람의 초에 옮겨 붙고, 또 옮겨 붙으면 결국 온 방안이 환해집니다. 에베소의 12명은 그 작은 불씨였습니다. 그들이 성령 충만의 의무를 다했을 때, 에베소 전체에 복음의 빛이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의 어둠이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바꾼 평양 대부흥 운동은 거창한 집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길선주 장로님이 자신의 죄를 대중 앞에서 통회하며 성령의 임재를 구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성령 충만한 회개와 순종이 불씨가 되어 평양 전역을 변화시켰고,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의 12명이 에베소를 뒤집어놓았듯이, 오늘 우리가 성령 충만의 의무를 다할 때 우리 가정과 이 나라는 변화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교회만 다닙니다.” 혹은 “저는 지식적으로만 압니다.”라고 머뭇거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령 충만은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의무입니다. 우리가 이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신앙은 메마른 광야가 되지만, 이 의무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삶은 생수가 터져 나오는 낙원이 됩니다.

 

우리 함께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첫째, 내 힘으로 신앙생활 하려 했던 교만을 회개합시다. 둘째, 성령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고 환영합시다. 셋째,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구하며 성령의 권능을 간구합시다.

 

하늘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그 약속을 붙들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의무가 기쁨이 되고 사명이 능력이 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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