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마가복음 6장 5절)
홍철기 목사(서울서부지방회장, 성원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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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양이의 경계선
우리 교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길고양이(축복이)는 작년 겨울, 우리 교회 담벼락에서 태어나 우리 교회 식구가 되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살아났다고 하여 ‘축복이’라고 불립니다. 고양이들은 굉장히 경계심이 많고 자신의 영역을 쉽게 벗어나지 않는 동물입니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경계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 축복이 역시 성전 정문 앞에서 밖으로 쉽게 나가지 않고, 다른 길고양이들 역시 우리 교회 정문으로는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축복이가 우리 교회에서 대원아파트 쪽으로 경계선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길고양이의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히 우리 교회 정문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외할머니 댁에서의 풍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술래잡기하며 뛰놀던 시골 동네의 모습들, 외할머니가 부르는 순간,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겨 집에 들어가 밥을 먹으려던 순간, 대청마루에서 제 동생과 저를 수건으로 먼지를 털어주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대청마루가 저의 경계선이었습니다. 옷을 벗기고 따뜻한 물로 씻기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먹는 저녁 식사는 비록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를 먹었지만, 세상 어떤 음식보다 귀한 왕후의 음식과 같았습니다.
2. 유대인의 경계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장 5~6절).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경계선을 그었습니다.
유대인의 경계선은 먹지 말아야 할 것과 먹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카슈루트(Kashrut)’라는 정결음식 제도로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 토끼고기, 말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되새김질하지 않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는 동물들은 부정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해산물 중에서도 새우, 조개류, 갑각류와 메기, 장어, 오징어 등은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햄버거 중에서도 치즈버거를 먹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음식 규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안식일(샤밧)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가장 중요한 날이기에 ‘멜라카’(מְלָאכָה, melachah)라고 불리는 ‘일’ 또는 ‘노동’으로 간주되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합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우거나 끄는 행위를 금지하며, 전기를 켜고 끄는 행위도 이에 포함됩니다. 냉장고 문을 열 때 램프가 켜지는 것도 금지합니다. 안식일에 비가 와도 우산을 펴는 것을 금지하며, 알파벳 두 자 이상 쓰는 행위도 금지합니다.
3. 경계선을 허무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음식의 경계선을 허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가복음 7장 15절). 외부의 음식이나 전통적인 정결 규례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신약의 베드로의 환상(사도행전 10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선명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5장 20절). 예수님은 안식일의 전통까지 허무셨습니다. 제자들이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고 비벼서 먹는 행위를 비난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예시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누가복음 6장 3~4절, 마가복음 2장 25~26절, 마태복음 12장 3~4절).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이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시면서 진설병을 먹는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누가복음 6장 5절, 마가복음 2장 27~28절, 마태복음 12장 8절). 누가복음 6장 5절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을 때에도 치료의 행위가 노동의 행위보다 더 옳다고 하시면서 안식일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안식일이 아닌 주님의 날(주일)로 부활하심으로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셨습니다(안식 후 첫날 요한복음 20장 19절). 초대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안식 후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주일 예배의 시작입니다(사도행전 20장 7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가복음 2장 27~28절).
예수님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허무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들을 철저히 이방인처럼 구분하고 경계선을 두었습니다. 앗수르 민족의 침략으로 혼혈이 된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인 복음을 증거하고 남편에 대한 삶을 꿰뚫어 보시고 그녀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 종교, 사회적 편견을 허무시고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4.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에게로(사도 바울)
에베소서 3장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사도행전 28장 15절 “그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
압비오 광장(Forum of Appius)과 트레이스 타베르네(Three Taverns)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갈 때, 로마에 있던 성도들이 바울의 소식을 듣고 그를 영접하기 위해 나왔던 장소입니다. 로마 황제나 고위 관리들이 지나갈 때에도 환영 의식이 거행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8장 15절에서 로마의 성도들이 바울을 ‘맞으러’ 나왔다는 표현에 사용된 헬라어 ‘아판테신(ἀπάντησιν)’은, 어떤 도시의 대표단이 왕이나 장군과 같은 중요한 인물을 성대하게 맞이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로마 황제가 방문할 때 시민들이 나와 환영하는 것처럼, 로마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극진히 환영했기에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입성했지만 성도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에 힘을 얻었습니다. 전도 여행을 하면서 당한 고난과 핍박, 로마로 입성하기 전에 사도행전 27장 20절을 보면, 배가 풍랑으로 심하게 흔들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극한 상황 가운데서 사도행전 27장 24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신 말씀을 믿고 마침내 로마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5. 불교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언더우드가 한국에 복음을 들고 들어올 때의 편지가 생각납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심부터 내고, 화부터 냅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이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한국에 있다면 얼마나 놀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신교가 세운 고등학교는 180개, 천주교는 38개, 불교는 15개입니다. 개신교 계열 학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압도적입니다. 대학교 또한 138개(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숭실대학교, 한남대학교, 계명대학교 등)로, 천주교는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불교 대학교로는 동국대학교 등 비교적 소수입니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에 엄청난 일들을 하였습니다. 첫 국회 개회식에서 기도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역사하는 모습을 만약 초기 복음을 증거한 선교사님들이 보면 얼마나 놀라워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개신교)는 한때 1,200만 명을 헤아리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현재 850만 명 수준으로 감소하는 추세입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숫자는 8만 개의 교회에서 현재는 5만 5천여 개의 교회로 주저앉은 실정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2000년에 400만 명을 기록하였고, 2024년에는 약 6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6. 경계선을 허물고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타민족에 대한 경계를 허물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아집에 갇혀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도 아직도 경계선을 허물지 않고 고집과 아집으로 살아갑니다. 이건희 전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필요합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했습니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의 선언입니다. 기독교에서 신경영 선언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본질인 성경(복음)과 성령을 제외하고 모든 것에 개혁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 성령의 역사가 원색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둘째로 히브리서 2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는 말씀처럼 욕심이나 세속적인 가치관에 교회와 목회자들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약해지면 흘러 떠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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