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에 대해” (마가복음 16장 14~20절)
이봉하 목사(강원제일지방회장, 예미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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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0 14:1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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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을 비교해보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작의 말씀이 다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시각과 관점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영웅의 일대기를 기록한다면 아마도 마태복음이 가장 근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강렬한 문구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영웅적인 서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시작에는 족보가 있어야 하고 출생의 비밀이 있어야 합니다. 족보가 있고 출생의 비밀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고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그런 것을 인정받아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은 제자들도 그렇지만 부활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사건부터 탄생까지 시간을 되돌려보면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도 자칭 예수라고 말하는 이단들이 있지만 그들이 죽으면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영웅적인 서사를 다 생략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출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1장 21절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고 23절부터 구체적인 표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후로는 표적과 말씀, 표적과 말씀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을 읽을 때 주목할 것은 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표적을 연결하고 거기에 말씀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마태복음은 예수님 다음에 말씀, 그리고 표적이 연결됩니다. 미세한 차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야단치십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에 대해 야단을 치십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국어사전에 ‘고집이 세고 사납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3년 반이나 훈련을 받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뿔뿔이 흩어지는 그들을 보면서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고 잘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이 정도는 예견하셨겠지요.
그런데 본문의 책망하는 내용은 ‘왜 부활의 사건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도 믿지 않았느냐’였습니다.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하게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전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너희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여기에다가 덧붙인다면 ‘내가 십자가에 달린다고 세 번이나 말하지않았느냐!’입니다. 또 덧붙인다면 ‘내가 너희에게 얼마나 많은 표적을 보여주었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입니다. 또 덧붙인다면 ‘내가 너희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힘과 병을 고치는 하늘의 능력을 주지 않았느냐? 아직도 믿지 못하겠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입니다.
부활 사건은 표적 중에 가장 큰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은 이렇게 시작했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보고 난 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즉시 나으리라’하셨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마치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라고 느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표적이 매우 중요하다’고 적어도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느껴집니다.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두루 나가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표적이 증언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표적이라고 마가복음은 전합니다. 표적을 본 사람들이 말씀을 믿게 된다고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마가가 살았던 시대는 박해의 시대였습니다. 박해시대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과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표적은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표적은 무엇일까요? 표적은 ‘인간의 상식과 합리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하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집사님에게 손녀딸이 있었는데 회계사 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인데 손녀딸의 엄마가 집사님께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새벽기도를 나오며 함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감사하게도 6개월 후에 합격하였습니다. 또 다른 집사님에게도 손녀딸이 있었는데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았고 함께 새벽기도를 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떨어졌습니다. 허리가 많이 아픈 상태로 새벽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였는데 떨어져서 저도 안타까웠습니다. 다음 해에 시험을 대비한다고 하여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7급으로 합격하였습니다.
신학적으로 표적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교단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순복음인 것이 너무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표적이 예수님 말씀의 핵심 중 하나의 가치라면 우리는 표적을 구해야 합니다. 나의 상식과 합리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하늘의 역사를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한 꿈을 꾸는 것도, 기도 중에 환상을 보는 것도,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고 상식적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아프면 병원부터 찾고 약부터 먹는 이런 환경에서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표적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기도한다고 매일 거룩한 꿈을 꾸는 것은 아니고, 기도한다고 매일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강력하게 기도하는 자에게 꿈을 통해서, 환상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표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말 그대로 우연입니다.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구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한 결과물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표적입니다. 이것이 우리 순복음의 나아갈 지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적을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적이 전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도 표적 때문이었습니다. 전도할 때마다 표적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표적은 우리의 믿음을 더 깊은 데로 인도합니다. 어떤 환자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통증환자였는데 기도 후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하셨어요?” 그 목사님이 “그냥 기도했어요. 그런데 낫더라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형태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실 줄 믿고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표적을 구할 때 중요한 점은 먼저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나타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행하셨던 표적을 생각하며 또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표적을 행하는 능력을 생각하면서 구해야 합니다. 어차피 표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성경의 방식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병을 치유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은사는 특별한 은총이나 능력을 말합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능력을 말하는데, 은사자들은 병이 어떻게 치료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환자를 놓고 기도할 때 그 통증 부위에 물리적인 힘 없이 손을 얹으면 통증이 은사자에게 전달됩니다. 팔이나 머리 다리 등 은사자 몸의 다양한 부위에서 통증을 느낍니다. 어떤 경우는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극심한 아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통증이 은사자에게 전달되면서 환자의 통증이 사라집니다. 은사자들이 느끼는 다양한 방법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암환자가 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암이 힘쓰지 못하게 해주세요! 암덩어리가 사라지게 해주세요!” 이전에도 암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분들도 평균 수명을 다하고 혹은 훨씬 넘어서 소천하셨습니다. 현재 암환자에게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할 것을 주문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강력하게 열망하라고 권면합니다. 저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힘든 일은 하고 있지만, 다행히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암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구하는 설교와 기도는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암환자 자신에게도 믿음의 진일보를 가져오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진심을 다하는 기도이지만 기적을 구하는 기도 자체가 가족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어느 시인이 사막을 걸으면 마음속으로 모래가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사막을 걷는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마음이 충격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암이 생기면 마음도 암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더 간절하고 강력하게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암이 없어지는 것만 표적이 아닙니다. 힘을 못 쓰는 것도 표적입니다. 그런 환자일수록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작은 봉사라도 괜찮습니다. 사명으로 암을 건너가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때에도 주님께서는 사명으로 건너가서 거라사 군대귀신 들린 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전도는 영혼 구원의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표적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마가복음의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전도 환경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게임에 빠지고 핸드폰에 빠진 청소년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도 무거운 숙제입니다. 두 살만 되어도 핸드폰에 빠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핸드폰 안으로 이미 깊숙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핸드폰이, 혹은 게임기가 그들의 또 다른 심장이 되고 있습니다. 막아야 합니다. 그들의 제2의 심장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인간의 오진을 막기 위해 AI가 진료를 대신하고, 교회 건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몇몇 인기 있는 목사님들이 온라인상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이 기존 교회들을 대체하게 된다면 교인 수는 급감하고 많은 교회 건물과 목사님들이 설 곳을 잃게 됩니다.
지평을 넓히는 것도 좋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등장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교회는 성전중심에서 벗어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결혼식장을 가도 시작부터 끝까지 예배와 하나님 중심의 결혼식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목사님들이 묵인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을 바라고 꿈꾸는 것, 표적을 구하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그 상식을 깨뜨려야 합니다. 부활은 표적 중에 가장 큰 표적입니다. 한번 죽은 자는 그 육체가 다시 살 수 없다는 인간의 상식을 깨뜨린 사건입니다. 설교시간에도, 기도시간에도 인간의 상식을 거스르는 표적을 전하고 구해야합니다. 주님께서 표적으로 우리 시대의 위기를 건너가시고, 모든 교회에 전도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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