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 (창 25:27~34)
이성행 목사(광주지방회 증경회장, 순복음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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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08:4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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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윌로우 크릭 처치가 있는데,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빌 하이벨스 목사라는 분이십니다. 그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자신이 목회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아버지는 아들을 장부답게 기르기 위해서 자주 여행을 시켰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4~500㎞씩 떨어진 곳까지 혼자 여행을 시켰습니다.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는 무작정 남미로 보냈답니다.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 마지막으로 리우데자네이루의 한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올라가 혼자서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코파카바나 해변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과 장래의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식힐 요량이었습니다. 청년 빌 하이벨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옆에 60대로 보이는 한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매우 흐믓해 하고, 또 행복해 보이는 노부부였습니다.
“여보, 우리가 그동안 고생한 가치가 있지? 이제까지 60년 넘게 먹지 않고 쓰지 않고 고생만 하다가 이런 멋진 휴가를 보내며, 오늘 밤에는 이렇게 호화로운 데서 호강까지 누리니 정말 고생한 보람이 있어.”
빌 하이벨스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노부부가 그렇게 어리석게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일생동안 안 먹고 안 쓰고 고생하다가 코파카바나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고급식당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게, 뭐 그리 행복한 일인가? 그게 인생을 걸 만한 일인가?’ 거기서 회의가 생겼답니다.
그날 밤에 숙소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적어도 이보다는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인생을 살게 해주십시오.”
그때 그는 그 일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행로에 대해 귀중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합니다. <팥죽 한그릇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했던 사건이었지만, 후에는 이 한그릇 팥죽 사건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느 날 형 에서가 대단히 지치고 피곤한 상태로 들에서 돌아왔을 때, 동생 야곱은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들을 뛰어다니며 사냥하느라 배가 고픈 상태에 있었던 에서는 동생 야곱이 끓이고 있는 팥죽 냄새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채로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내가 먹게 하라”는 말은 한글 성경에는 평범하게 쓰여 있지만, 원래 의미는 “나로 하여금 꿀꺽꿀꺽 먹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에서는 붉은 팥죽을 먹고 싶어 난리가 난 것입니다.
형이라는 사람은 지금 배가 고파 숨이 넘어가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또 한 사람 야곱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야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계속 죽만 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야곱이 입을 열었습니다.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절).” 무슨 말입니까? 팥죽과 장자의 권리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과 에서의 모습을 통해서 신앙생활에 승리하는 비결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1. 영적인 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실 야곱의 관심은 팥죽도 아니고 형도 아니었습니다. 장자권이었습니다. 야곱은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형의 장자권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권이 무엇이며, 그것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입니다.
장자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히브리 백성들에게 있어서 ‘코라’라고 불리 는 이 장자권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장자는 부모의 재산을 다른 자식들의 배나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장자는 집안일에 대하여 재판할 수 있었습니다. 장자는 가족들을 위하여 최후의 축복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장자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였습니다. 장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장자가 드리는 예배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장자권은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자권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중요한 장자의 명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형의 그늘에서 살았던 동생이었지만, 그는 장자권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달리, 형 에서는 영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창 25:32-33)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에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감정적이고 극단적입니다. 여러분! 만약 에서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면 몇 끼 굶은 것입니까? 겨우 한 끼 굶었습니다. 많이 잡아도 두 끼 밖에 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영적인 복을 놓쳤던 에서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처럼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귀한 것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현재보다 미래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야곱 자기 자신도 팥죽을 먹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참았습니다. 팥죽이 먹고 싶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데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왜요? 미래 때문입니다. 미래에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폴란드의 민화에 <바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바보들만 사는 바보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급커브가 많은 벼랑길이 있어서,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다치고 죽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대책을 논의한 결과, 벼랑 밑에 병원을 짓자는 의견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반면, 어느 누구 하나 “벼랑길을 개선합시다, 터널을 만듭시다”라는 의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몇 사람이 모여 얘기하다가 한 친구가 “나는 길을 개선하든지 터널을 뚫기를 원했었어”라고 말하자, 또 다른 사람이 “그래, 나도 사실은 그 제안을 하려고 했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한 의견을 내지 않았느냐?”고 묻자, “길을 뚫으려면 막대한 희생과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아 차라리 병원을 짓는 편이 낫겠다 싶어 그만 뒀어.”
이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면서 바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치르게 될 희생에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신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줄 일에 감히 뛰어들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미래의 축복된 삶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야곱은 미래에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꿈꾸며 먹고 싶은 것도 참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반면, 에서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는 미래의 축복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미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때 일은 그때 가서 보는 거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오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써버렸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34절을 보겠습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장자의 축복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해도 아직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은 것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에서는 바로 꿈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무 꿈도 없이 아무 비전도 없이 아침이면 일어나 밥 먹고 직장 가서 일하고, 밤이 되면 집에 돌아와 또 밥 먹고 잠자고, 아침이면 일어나 또 밥 먹고 직장 가고 때가 되면 먹고 자고 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에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에서는 후에 동생 야곱에게 자기의 축복을 다 빼앗긴 후, 아버지를 찾아가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요청합니다. (창 27: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그러나 아버지 이삭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또 아비에게 요청합니다. 역시 아버지 이삭은 냉혹하게 거절합니다. 축복이 아닌 저주와 같은 말을 남깁니다.
(창 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먹기 위해서 살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팥죽 한 그릇에 자기의 미래를 팔아먹은 에서처럼 먹는 것, 마시는 것, 쓰는 것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에서처럼 영적인 것을 경홀히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야곱처럼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현세적인 것보다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미래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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