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별설교 /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0~14)
유순종 목사(서울신광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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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7 13: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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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되면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기독교인들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심지어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가 들떠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거리에는 현란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가 세워지고, 백화점, 식당, 술집들은 손님을 맞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들떠서 흥분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 대부분의 머리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미국 명문 대학 심리학 교수가 40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크리스마스”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써 낸 내용 가운데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선물, 공휴일, 데이트,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크리스마스 카드, 파티” 등, 한 사람도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말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우리들은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을을 가지고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오직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축하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찾기까지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탄식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생명을 얻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을 축하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성탄절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어둠의 땅에 참 빛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을 떠나 유리 방황해야 했던 인간들은 육체적인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은 무지하였고, 철저히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모습에 관해 사도 바울은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었다”(엡 5:8)고 말씀하였습니다. 영적인 어두움에 빠진 인간이 만들어 낸 일이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요, 육체적으로 온갖 부패와 타락에 빠져드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결국은 절망과 죽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이 절망적인 인간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 영광의 왕이 죄악이 가득한 거친 세상에 찾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범죄하여 영적으로 어두워진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 어두움을 몰아내는 참 빛이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사실에 관해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실로 어두움에 살던 인간들은 참 빛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빛을 반대하고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이 반대하고, 우두움의 주관자가 그 분을 적극적으로 핍박했을지라도 그리스도는 이 땅에 참 빛과 참 생명을 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뭇생명들이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므로 그 은혜를 입은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죽음의 땅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영적으로 모든 인간이 죽어 참담한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온 세상은 죄악과 부패의 냄새로 진동했고,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하고 부와 재산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실상을 감추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들은 헛될 뿐이었습니다. 정녕 죽은 시체에게 화장을 한다고해서 그 시체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노력하고 힘쓸지라도 결국에는 죽음으로 귀결되고 맙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인생에게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사망 권세 아래 신음하던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죄 아래 머물렀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전혀 죄가 없으셨습니다.(히 4:15) 점도 흠도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대속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장사된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정녕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구원의 길이 열린 날입니다. 생명의 길이 열린 날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의 땅에 생명을 가지고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아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게 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간과한다면 성탄절은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에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날이다.” 그래서 감사와 감격 속에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 절망의 땅에 소망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비유 가운데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찰나적인 쾌락과 순간적인 만족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인생은 철저한 탄식과 절망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명과 복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탄식하는 인생들임에도 전혀 그것을 개선할만한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아픈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회생불능한 인생들을 친히 찾아오셔서 그들의 삶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에 유대인들은 그들 종족의 절반에 가까운 6백만 명이 히틀러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6천명도, 6만명도 아닌 6백만명을 일시에 잃어버린 유대 민족은 재기불능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들은 기적적으로 옛 땅을 다시 찾고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처참하게 파괴된 유대민족을 재기하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은 소망의 빛이 있음을 믿었고, 사랑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학대와 멸시 속에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믿었고, 하나님께 애타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소망을 가졌기에 그들은 그 절망에서 재기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을 뛰어넘어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은 절망의 땅에 소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성탄절은 소망을 충전하는 절기입니다. 배터리를 다 쓰고 나면 충전기를 통해 충전하듯 험한 세상 살아오면서 소진된 소망을, 소망의 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총회원과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둠속에 방황하는 우리에게 참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권세아래서 신음하는 우리에게 참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절망하며 탄식하는 우리에게 참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은총의 시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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