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삶을 살자 (시 123:1~4)
안재식 목사(일산동지방회장, 순복음예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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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부지역에서 선교사로 16년 동안 사역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제가 사역하던 H 도시에는 패션 가방 사업을 하는 한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그곳에서 작은 공장들을 운영하였는데, 그때 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집사님이 저에게 좋은 구경시켜 주신다고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 분을 따라간 곳은 수출용 소파를 만들고 남은 ‘폐 가죽’ 창고였습니다. 근데 그 공장 사장님이 소파를 만들다 남은 ‘폐 가죽’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어 그분께 물었습니다. 그분이 대답이 “선교사님! 이 폐 가죽이 고급 가방의 ‘원재료’가 됩니다” 하시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폐 가죽’을 잘 다듬고, 세정하고, 도색해서 멋진 가방의 재료로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완성된 가방은 한국 백화점에서 상당한 고가의 가방으로 판매된다고 했습니다.
그 ‘폐 가죽’이 고급 가방의 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 시간이 소요됩니다. 가방을 제작하는 제작자들과 소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인내심이 굉장히 요구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우리의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길이 있으며, 이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실패
아담은 자기의 삶이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삶은 하나님을 섬기며, 에덴동산을 지키고 가꾸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그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아담의 삶을 아담의 것이며 아담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스스로가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겠다,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가 없다, 나는 독립적인 인생을 살겠다”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스스로 만든 인생을 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자기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 가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병들고 연약하고 죽음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복되고 풍요로운 삶을 만들려고 했지만 항상 저주와 가난과 가시와 엉겅퀴가 인생을 가로막았고 그들 힘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 살고 싶지만 때가 이르매 죽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삶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후 인간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가 초토화되고 비이성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과학은 대량 살상무기를 만들면서 인간이 이성과 과학을 통해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자존하여 자기 인생의 길을 자기가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인 것입니다.
2.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삶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평생동안 사셨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자기 스스로 원해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또 마태복음 1장 22~23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주신 뜻에 따라 30세에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요단강에서 침례 받고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 이끌려 광야에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마 4:1~2).
그 이후 3년여의 공생애는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도 하나님께서 주신 뜻이요, 3일 만에 부활하심도 하나님이 주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요 7:28~29).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보내심의 삶인 것입니다(요 12:49~50). 충실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했지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가는 그러한 역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보면 아담의 삶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인생의 좋고 나쁜 것을 자기가 결정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려던 아담과 하와는 죄의 종이 되고 더러움의 종이 되고 질병과 저주와 절망과 죽음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 삶을 살았습니다. 스스로 인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충실하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태어남과 사역과 죽음까지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는 마땅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우주의 창조주시며 절대주권자로 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우주의 중심은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천지와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개인과 나라와 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4절에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으며 시편 139편 16절에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다시 재현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정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삶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그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보십시오. 창세기 12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인생, 보내심을 받은 인생에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주인이 먼 길을 갈 때 종을 불러서 각각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종들과 계산을 할 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들은 열심히 일해서 네 달란트, 열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칭찬받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파묻었다가 도로 갖고 왔습니다. 주인은 대노했습니다. ‘장사를 하기 싫으면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보태어 내놓아야 될 것이 아니냐? 이 게으른 놈을 바깥에 내어 던져라’고 했습니다.
달란트는 적게 받을 수도 있고,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우리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다르지만 자기가 받은 능력에 충실하게 열심을 다해 그 능력을 30배, 60배, 100배로 개발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말했습니다. 또 성경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 안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성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주권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내 뜻대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 주신 인생을 나는 살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다리며 하나님이 주신 삶을 충실히 잘살아 내면 반드시 훗날에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하나님의 칭찬과 함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 있는 나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9장 21절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고 했으며, 시편 37편 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23편 1~4절에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종은 자기가 아무리 열심을 내어서 일을 한다고 해서 주인에게 칭찬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시키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동으로 가라고 하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라면 서로 가야 합니다. 주인이 시키시는 일을 할 때 칭찬을 받지, 자기가 지혜 있고 총명하고 능력 있다고 주인이 시키지 않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종도 한가지입니다. 집 안에서 주모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주모가 시키지 않았는데 집안 살림을 이리저리 옮기고 자기 마음대로 집안을 정리정돈 했다고 칭찬 받지 않습니다. 주모가 시키는 일을 할 때 칭찬받는 것입니다. 종이나 여종은 주인을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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