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이를 말이 있다” (눅 7:36-50)
이풍우 목사(호남지방회장, 순복음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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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8 09: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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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트집을 잡으며 훼방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단호하셨다. 설사 그들의 내뱉는 말은 옳을지라도 전혀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고(마 23:3), 그들의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위선이었으며(마 23:5) 높은 자리와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마 22:6). 구원을 받기는커녕 천국 가는 것을 방해하는 무리였다(마 23:12).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독사의 새끼’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러한 바리새인 중의 하나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을 때의 일이다. 한 여인이 향유를 들고 와서 예수님의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더니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춘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고 침묵이 흐른다. 이 느닷없는 사건을 잠잠히 지켜보던 시몬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39). 그는 예수님께 크게 실망했다. 기대했던 선지자의 영성과 경건함은 없어 보였고 더러운 여인의 음란한 짓거리에 놀아나고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시몬의 마음을 아셨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다. 그리스도를 초청하고서도 삭개오와 같은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실망과 혹은 분노에 빠져 혼란한 순간을 맞고 있는 영혼에게 그리스도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1.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2)
1) 예수께서는 빚을 탕감받은 자들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능력이 없어 주인이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물으셨을 때 시몬은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자기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였고 예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셨다.
2) 모든 것이 은혜다.
빚은 우리의 범죄를 상징한다. 저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다. 죄 없는 자는 없다. 모두는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험악한 가시밭길을 걷고 살아가는 수고로운 인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사랑하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께 담당시키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죄 사함이 하나님의 은혜다.
3)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여인처럼 그리스도에 발아래에 무릎을 꿇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눈물이 뜨겁다.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아니다. 죄 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죄는 항상 무거운 것이었고 깊은 탄식과 절망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죄 사함의 은혜를 입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면, 그리스도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죄는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든다. 사람을 추하고 악하게 만든다. 본인을 곤혹스럽게 하며 이웃을 괴롭힌다. 죄 사함을 얻지 못하면 은혜받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며,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이 바리새인처럼 쏟아져 나온다. 죄 사함의 은혜가 넘쳐 여인처럼 그리스도를 많이 사랑하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
2. 이 여자를 보느냐? (44)
(1)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물으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경험하는 일상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산다. 그리고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그 수없는 생각이 사람을 죄인 만들기도 하고 의인을 만들기도 한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일상에서 당신의 주목을 끌만한 것은 무엇인가? 향유인가? 아니면 여인의 눈물인가?
2)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복이다. 보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캄캄한 세상을 살 수 밖에 없다. 언제라도 위험에 노출 될 것이며 모든 것을 더듬으며 살아가는 답답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혼돈과 두려움의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는 눈에도 모순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으며 보여지는 것이 다가 아니며 조그마한 장애가 있어도 제한을 받는다. 색안경을 끼면 다른 색깔로 보이고 때로는 굴절되어 보이기도 한다. 보여지는 것이 거짓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진실을 간과해버릴 때가 있다. 내가 보는 것이 옳고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3)이 여자를 보느냐
예수님의 보시는 눈과 시몬이 보는 것은 다름을 말씀하고 있다. 시몬은 여인을 추하게 보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한심하게 보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 여인을 정죄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는 선지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죄악과 편견과 아집에 빠져있는 사람의 모순이다. 본다면 진실을 봐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남이 보지 못한 것까지라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인은 죄 사함을 받았다. 더는 죄인이 아니며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시몬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자기식으로 보면 안 된다. 세상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신령함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인의 눈이 아닌 은혜 입은 영혼의 눈으로 보기 바란다. 습관과 편견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겉이 아닌 속을 볼 수 있으며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3. 너는 너를 보라.
1)오늘의 주인공은 결코 여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시몬 자신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눈을 떼고 오늘의 주인공인 너 자신을 보라는 듯 시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씀하신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타인만 억지를 부리듯 바라보는 모순을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신 것이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다.’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리스도께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예의도 섬김도 빈약했던 시몬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마저 부인해 버리는 행동은 바리새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2)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얼마나 아는가? 자신을 모르는 것은 큰 병이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은 항상 타인의 일로 요란하다. 교만하고 오만하다. 남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를 한다. 자신을 살피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만 살피는 이상한 사람들! 나보다 낫게 보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남을 칭찬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다.
3)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한다.
남을 말하기 전에 나를 말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나를 낮추고 눈물로 진실을 말하며 향유로 자신을 허비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신앙인이 아름답다. 타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 묵묵히 눈물로 자신을 고백하듯 남이 아닌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론
은총의 기회가 실망과 범죄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자리에서 자신을 변방으로 밀어내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은혜에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복 있는 영혼이 되어야 한다.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으로 사랑을 말하는 바리새인보다 감사의 눈물로 발을 씻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 사함을 받아야 비로소 행복해진다. 죄 사함을 받아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어두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겉과 과거만 보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시몬에게 이른 말씀은 신뢰와 평온이 흔들리는 영혼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르신 말씀으로 위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향유의 아름다운 향기는 늘 그런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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