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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평생 주의 복음 위해 헌신 > 인물/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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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평생 주의 복음 위해 헌신 > 인물/인터뷰




인터뷰 |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평생 주의 복음 위해 헌신

오창중앙교회 오세억 장로의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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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굼 작성일18-05-2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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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절대절망에서 현명한 아내를 만남으로 인생이 바뀐 오 장로.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한 후 평생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교회건축을 위해 5년 동안의 과수원 수확물을 드렸으며, 국민들의 긴급 안전망 구축을 위한 ‘119 구조대 창설’을 제안해 통과시킨 최고의 소방 공무원이었다. 그는 현재도 순복음총회 청주신학교 이사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기여하는 등 80세 고령에도 교회와 사회를 위한 열정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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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가 사랑의 만남을 이어주다


검도는 오세억 장로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매개체였다. 오 장로는 일본에서 유명한 스승으로부터 검도를 전수받았다. 청주고등학교 2학년 때 충북에서 유일하게 검도부가 창설되어 선수로 활동하면서 전국체전 4연패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총 9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청주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대학생활을 할 때 공인 5단으로서 고등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때 검도를 배우던 김상용 학생(현재 청주중앙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을 만났다. 그 만남이 자신의 일생일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4·19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입대를 했다. 최전방 근무는 고단하고 지루했다. 자신을 잘 따랐던 김상용 학생은 누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가 바로 청주사범대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고 김상애 목사다. 힘든 군생활은 펜팔로 나날이 행복했다. 부푼 꿈을 안고 제대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사이 집은 경제적으로 파산이 되어 있었다. 매일 같이 빚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 왔다.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장남으로서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상애 목사를 만나 솔직한 심정을 전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했다.


법대생의 찬란한 꿈은 사라지고, 참담한 현실을 정직하게 고백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상애 목사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금메달을 딴 검도의 기개는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나는 돈을 보고 사귄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 됩니다.”


남자보다 패기 넘치는 연약한 여자의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래! 죽을 힘을 다해 가계를 살려야겠다.’


그 길로 일자리를 찾았다. 법대생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무슨 일이든 찾았다. 1962년 12월 20일 눈이 무릎까지 빠지도록 내린 날, 경찰관 시험에 응시했다. 대학을 졸업해도 마땅히 취업할 곳도 없던 시절, 무려 600명이 응시했다. 그 가운데 24명이 채용되었는데 합격했다.         


하나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천주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다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결혼을 했다. 예식은 천주교 성당에서 하고, 결혼반지는 시장에서 2백원을 주고 산 스탠반지로 대신했다. 월급을 받으면 한 사람은 빚을 갚고, 나머지 한 사람 것으로 생활했다. 지독히 가난한 살림으로 겨우 하루하루 버티어 나갔다. 그러다 첫 아이를 낳았다.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해 그만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기가막힌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이 참담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처가에 소식을 전하러 가다가 논길에서 장모를 만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장모는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하고 김상호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예배를 드리는데 김상애 목사가 살아난 것이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나듯 일어났다. 이는 분명 하나님이 살리신 것이다.


원래 오 장로 가정은 천주교 신자였다. 하지만 죽은 아내를 살리신 하나님을 목격하고는 더 이상 종교의식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천주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청주순복음교회로 옮기면서 가족 간에 갈등이 시작됐다.


가난한 생활은 종교적 갈등이 더해져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집을 나섰다. 둘 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동안 빚을 갚으며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라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처량한 마음으로 장모 집에 들어가 살았다. 김상애 목사는 청주 시내가 아닌 오지로 발령이 떨어졌다. 그것을 수습해 보려고 사방으로 노력했으나 몇 개월은 기다려야했다.


김상애 목사는 천성적으로 몸이 약하다. 오지에서 생활하면서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온 몸에 한기가 나고 담이 걸려서 거동을 할 수 없자 청주 시내로 나와 병원 진찰을 받았다. 병명은 ‘결핵성 늑막염’이었다. 더 위험한 것은 임신 3개월째였다. 입원할 돈이 없어 약을 사서 집에서 치료했다. 별 효과도 없이 나날이 쇠약해졌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야 하기에 다시 청주순복음교회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다. 매일 모여 기도하는데 2개월 만에 깨끗하게 치료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두 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졌다.   
       
과수원 5년 수확을 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리다


1973년 8월 16일 밤, 초막집 안방에 모여 하나님의 강권하심 속에서 역사적인 청주중앙순복음교회(당시 사창순복음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이곳은 청주시 변두리로 겨우 20여 가구가 산다. 앞산을 넘어 가면 공동묘지다. 사람의 생각으로 교회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서 교회는 날마다 부흥해 나갔다.


성도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성전건축을 위해 200평을 구입했지만 건축비가 없었다. 그때 오 장로는 하나님 앞에서 큰 결단을 내렸다.


지난 날 야산을 개간해 과수원과 목장을 일구었는데, 과수원 수확금 전액을 건축헌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처음에는 3년만 작정했다. 3년이 지났는데도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2년을 더 연장했다. 5년 동안 과수원 수확물을 단 한 푼도 빼지 않고, 전부를 성전건축 헌금으로 드렸다.


사실 빚을 내어 과수원을 운영하던 터라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극빈가정으로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래도 교회가 최우선이었다.


“과수원은 두 사람의 약자를 따라‘OK농장’이라고 했습니다.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 둘이 만나 땀과 눈물로 일군 꿈의 농장입니다. 첫 번째 탐스러운 사과가 열렸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팔아 빚을 갚고, 아이들을 교육할 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초라한 성전을 보는 순간, 우리의 꿈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방치해 두는 것은 장로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5년의 수확물을 기쁨으로 받으셨다. 이 일 후 과수원 부지가 개발되면서 경제적으로 축복의 문을 열어 주셨다.


긴급 환자들을 위해 119 구조대 창설 법안을 제안하다


경찰공무원으로 일하던 오 장로는 경찰서보다 소방서 근무가 좋았다. 대한민국 첫 번째 소방관 시험에 합격했다. 소방관 1기생이다.


청주소방서장으로 재직할 때 청주 시내 어린이 놀이터가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린아이들이 놀기에는 안전하지 못했다. 대대적인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청주 시내 41개가 되는 어린이 놀이터를 수리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이 일을 고민하던 중 도움을 준 한 기업의 후원을 받아 어린이 놀이터를 깨끗하게 수리했다.
그것뿐 아니라 아시아 최대 규모의 기업에 혹 화재가 발생한다면 긴급하게 진압하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해 소방 파출소를 지어 달라고 건의했다.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정부와 기업이 함께 투자해 소방 파출소를 설치했다. 이 일로 청와대까지 보고되어 내무부민방위본부 소방국 예방과장(소방감)으로 승진했다.


무엇보다 오 장로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119 구조대 창설 법안’을 제안해 1988년 통과시켰다.


119 구조대는 아내의 영향이 컸다. 오지에서 근무할 때 지병으로 고생했던 것을 기억하며, 누구나 긴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부산광역시소방 본부장(소방정감)을 역임하는 등 오 장로는 소방관으로서는 우리나라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사회 안전망과 신뢰를 구축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 장로는 지난 4월 20일 대한민국 재향소방동우회 제6대 회장에 취임했다.


순복음총회 청주신학교 이사장으로 후학 양성에 앞장서다    


1938년 3월 23일 출생한 오 장로는 벌써 80세이다. 고령이지만 여전히 교회와 사회를 위한 다양한 섬김의 삶을 살고 있다.


현재 넷째 아들 오순석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오창중앙교회에서 장로로 교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 교회는 아내 고 김상애 목사의 기념교회로 헌당했다. 아내의 유지를 따라 순복음총회 청주신학교 이사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뿐 아니라 벧엘순복음교회를 건축했으며, 오창에 성산금식기도원를 건립해 충청권 지역 영성운동에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오 장로는 검도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62세 때 전국고단자대회 동군주장으로 서군주장을 제압하여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고희의 나이에 미국 검도계 챔피언이 도전장을 걸어 왔을 때 단 3분 만에 경기를 끝냈다. 전 유럽 챔피언이었던 일본의 싯카이가 도전해 왔을 때도 10분 만에 제압했다.  
청주시 YMCA 이사장, 충청북도 검도회장, 교회연합 공동회장을 역임했으며, 4·19혁명기념회 충청북도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녹조근정훈장, 대통령표창, 대한체육회장 공로표창을 수상했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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