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교회 개척, 화평과 소통으로 아름다운 역사 이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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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성총회 교회의 역사를 찾아가다 / 서울이태원교회 (조삼록 원로목사, 지성호 담임목사)
故 조명록 목사, 예전과 성령을 두 축으로 교단신학의 기초를 닦아
조삼록 원로목사·지성호 담임목사, 배려와 존중의 아름다운 동거
서울이태원교회는 역사가 깊다.
뿌리 깊은 나무답게 잔바람에 흔들림 없이 지친 사람들을 보듬어 주고 있다.
교회 역사는 1953년 5월 20일 주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하성교단이 탄생한 그 해이다. 6·25 전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어수선할 때 미국의 허홍 목사의 주선으로 이태원2동 225번지에 서울이태원교회를 개척했다.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은 용산 남부교회에서 기름 장사를 하던 한 여인이 성령세례를 받고 이태원2동으로 이사 오면서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다.
최초 교역자는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최요열 전도사다.
1956년 7월 20일에는 미국 무명의 신자가 헌금하므로 대지 216평을 매입했다. 당시 교회 주변은 복숭아밭, 호박밭이었고, 일본 사람들을 위한 화장터도 있었다. 남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낙후된 지역이었다. 청나라 때부터 군사지역으로, 전쟁 후에는 미8군이 주둔했다.
척박한 땅에 땀과 눈물로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교회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지역 사회와의 관계가 중요했다. 조 목사는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지역 교회로 터를 닦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순복음교회는 이질적인 교회(?)였다. 성령운동에 대한 신학적 몰이해로 오해와 핍박을 받았다. 순복음교회가 한국교회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연합사업의 터도 닦아야 했다. 조 목사는 초교파적으로 ‘오순절 성령운동 선교회’를 조직해 초대교회 성령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조 목사는 목회자이며 신학자요, 교단 총무, 총회장을 역임한 탁월한 행정가였다.
열정적인 사역으로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해 갔다.
1963년 첫 번째 1층 성전을 봉헌했고, 1972년에는 2층 성전을 봉헌했다. 그러다 1987년 2월 11일 조 목사가 소천하면서 교회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몇 분의 교역자들이 부임했다가 사임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 일부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7개월 정도 교역자가 공백이 되었다.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며 장로들이 조삼록 목사를 찾아왔다.
1993년 7월 조삼록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는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조삼록 목사는 故 조명록 목사의 동생이다. 형님 목사가 피눈물로 닦아 놓은 교회를 허무하게 무너지게 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 교회에 부임했다.
교회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야
형님 교회를 계승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웠다. 과감한 드라이브는 자칫 혼돈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조 목사의 목회 철학은 분명했다. ‘교회로 시험에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분열보다 화평이 낫다. 교회는 한 몸으로 생명공동체다. 아픔을 주면서까지 무리하게 성장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조 목사는 교회의 화평을 가장 중요시 했다.
강단에서는 거짓말 하지 않고 정직하게 설교하고, 일상에서는 목양에 성실했다.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내 주장을 집요하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지역 환경이 변화하면서 교회 주차장 문제가 대두되었다. 1996년부터 교회 주변 주택을 매입했다. 3동을 매입해 2002년에는 주차장을 확보했다.
모든 일들을 화평 가운데 진행했다. 교회다움과 목사다움을 추구했다. 사심(私心)없는 목회로 교회는 항상 평온했고,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다음세대로의 교체는 교회적으로 중요한 과제다. 잘못된 교체는 교회 역사를 단절시키고 성도간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 변화의 시점에 서 고뇌하며 기도했다.
그러다 같은 지방회 소속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던 지성호 목사를 불렀다. 1년을 함께 사역했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담임목사와 교회간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다. 정치적 판단보다 늘 하던 대로 화평 가운데 조용히 진행되었다.
2012년 3월 25일 지성호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조삼록 목사는 2013년 5월 19일 교회설립 60주년을 맞은 역사적인 날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조삼록 목사와 지성호 목사는 인척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제 관계도 아니다. 한 지방회에서 서로를 묵묵히 지켜 본 사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아버지와 아들, 스승과 제자보다 더 돈독하다.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매월 첫 주 주일예배와 셋째 주 오후예배는 조삼록 목사가 설교한다. 크고 작은 교회일은 함께 돌본다.
조삼록 목사는 담임목사와 사역에 대해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지성호 담임목사도 원로목사와 사역에 대해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원칙이다. 서로를 신뢰하고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아름다운 동거는 교회를 더 안정적이고 건강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기다리는 교회에서 찾아오는 교회로
2015년 교회를 현대풍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했다. 고품격의 음향장비를 장착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위한 공간을 다양하게 꾸몄다. 특히 예배당에 작은 창문들을 달았다. 세상을 향한 소통의 창을 연 것이다.
지역을 위한 창은 문화공연과 섬김사역이다. 2014년 5월 17일에는 서울내셔널심포니오케스트라, 월드미션언약의사람들, 셀라찬양대가 협연해 용산아트홀에서 이웃초청 콘서트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언제든지 공연할 수 있도록 예배당도 열린구조로 디자인했다. 또 지역 어르신을 위해 과일을 대접하고, 관공서와도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과 개인의 소통의 창은 영성사역이다. 은사는 받았는데 내적인 죄는 이기지 못하고 있다. 지성호 목사는 2013년부터 성화기도학교를 열고 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다. 성화운동을 목회에 적용하면서 거룩함과 성숙함이 깊어 가고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 목사는 “이제 교회는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찾아올 수 있는 교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이태원교회의 비전은 급변할수록 목회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건강하게 부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역동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도 산다. 이 일을 위해 기도와 말씀운동에 더 깊이 집중하고 있다.
1953년 시작된 서울이태원교회는 오늘로 63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역사적인 교회를 계승해 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해답은 간단하다. 지성호 목사는 “두 템포만 늦추면 된다”고 말한다.
전통 위에 개혁의 역사를 써 가는 서울이태원교회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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