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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현장

모든 것을 나눠주고 선교지로 … “목회는 죽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낮은 자리에서 예수의 향기를 발하는 순복음성산교회 신금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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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25 14:32

본문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의 끝자락에서 임했다. 사람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조용히 죽음만 기다리고 있던 그때 하나님이 찾아왔다. 신금자 목사의 집안은 철저한 불자였다. 교회를 가본 적도 없고, 애써 예수를 믿으려 하지도 않았다. 평온한 일상은 암 진단을 받으면서 산산이 깨졌다. 스물여덟 나이에 암은 사형선고였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혼자 일어서지도, 한 걸음 조차 걷지도 못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신금자 목사.jpg

 

누군가 예수를 믿으면 산다고 했다. 살아보려고, 살아야 하기에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았다. 고통이 엄습해 오자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차라리 뒹굴다 죽고 싶었다.

 

 아픈 몸을 감싸고 엎드려 있는데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저 곳이 어디인가?” 물었다. 목회자 사무실이었다. 난로에 물이 끓고 있는데 한약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를 따라 나도 모르게 갔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니 그냥 물이었다. 그 순간, 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내가 걸어서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놀라운 것은 암의 고통이 없어졌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이 치료한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고 했다. 가족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다들 신기해하면서도 재 진찰을 받고 확증해 보자고 했다. 대학병원에서 다시 진찰을 받았다. 암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목격한 가족들이 예수를 믿었다

 

죽음의 고통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금자 목사는 이 일로 인생이 바뀌었다. 살아가는 이유가 더 이상 내 유익이 아니었다.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았으니 새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었다. 당시 신금자 목사는 패션 사업을 하고 있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어느 날, 삼각산에서 기도하는데 환상이 보였다. 그 환상 속에서 하나님은 부유함보다 진실로 나를 더 사랑하는지 물었다.

돈을 다 가지고 가세요. 하나님이 내 생명의 보석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돈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다. 한 개척교회 성전 건축을 도우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42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대담한 모험을 요구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싱가포르로 가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에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그리고 빈손으로 싱가포르로 떠났다. 싱가포르의 삶은 고단했다. 힘들고 어려운 교회만 찾아가라고 했다. 기도하고 애써 전도해서 교회가 성장하면 다시 더 어려운 교회로 가라고 했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무명의 전도자로 빛도 없이 섬기며 선교에 전력을 다했다.

 

6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말레이시아로 떠나라고 했다. 거기서도 작은교회를 섬기다 다시 부흥하자 큰 교회로 옮겼다. 조용히 사역하라고 해서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성도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담임 목사님이 유치부를 맡겼다. 유치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새벽마다 어린 영혼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했다. 뜨거운 기도로 유치부가 부흥되었다.

 

 그러자 교회에서 정식 전도사로 사역하라고 했다. 교회는 성장했는데 이번에는 내적으로 갈등과 다툼이 생겼다. 교회가 분열되었다. 교회 분열의 아픔 속에서 초신자들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아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다. 누군가 그들의 영혼을 책임져야 한다. 난감했다. 교회를 맡아 개척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당시 3개월마다 여권을 연장했는데 이제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나? 그러던 차에 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태국으로 떠나면서 교회개척은 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말레이시아로 가라고 했다.

아니! 하나님 말레이시아 여권이 만료가 되었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말레이시아도 내 땅이다.”

 

공항으로 갔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하나님 이민 직원을 졸게 해 주세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민 직원이 졸다가 무심결에 도장을 찍었다. 그 길로 대사관에 가서 새롭게 여권을 연장했다. 결국 말레이시아 교회개척은 피할 수 없는 십자가였다.

 

 막상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니 생각이 많았다. 처음에는 교인 5가정을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다시 5가정을 더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10가정이 모였다. 사람들이 모아졌으니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호텔에서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은퇴한 목사를 청빙해 설교사역을 맡겼다. 5주 동안 호텔에서 시작해서 점차 안정적으로 부흥해 나갔다.

 

 

성산교회2.jpg

 

성산교회3.jpg

 

 성도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건물을 얻어야 할 상황이었다. 수중에 40만원이 전부였다. 그것을 먼저 심었다. 그러자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해 두 층을 얻었다.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교회 분쟁으로 떠났던 원로 목사를 다시 청빙하기로 한 것이다. 교회 아픔을 겪으면서 원로 목사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 날 과오를 성찰하면서 마지막 주어진 목회사역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고백했다. 교회가 새롭게 회복되면서 날마다 부흥해 나갔다.

 

교회 전도사로 임명 받아 사역하면서 사례비를 받았다. 자동차도 임대해 주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선교사역을 하면서 11년 만에 처음이다. 3개월이 지났다. 교회가 안정되었으니 또 다시 하나님은 떠나라고 했다. 마음이 상했다. 이제야 겨우 전도사로서 대우를 받는데, 싫다고 거절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는데 자동차 바퀴에 이상이 생겼다. 차를 세우고 고치는 중 낯선 남자들이 다가와 교회 청년을 협박하고, 차 안에 있던 지갑을 가지고 갔다. 그때서야 하나님이 떠나라는 사인인 줄 알았다. 새벽에 울면서 떠나겠다고 고백했다. 마침 서울에 계신 한 목회자가 그만 고생하고 오라고 했다

 

가평은 가도 가도 산이었다. 그 깊은 산속 그린캠프에서 기도하고 전도하면서 4년을 보냈다. 그 사이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사역을 착실히 준비했다. 때가 되어 막상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빈손이었다. 오로지 기도에 전념했다.

 

 하나님이 뜻하지 않는 곳에서 개척 자금을 보내 주셨다. 개척자금을 받자마자 더 가난한 교회 3곳을 선정해 후원했다. 그리고 산자락 밑에 땅을 구입했다. 건축 허가는 떨어졌는데 문제는 지역 원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절대 동네에 교회를 건축하지 못한다며 민원을 제기하겠다고 했다.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했다. 건축해도 된다는 도장을 받아오면 허락한다고 해서 이장을 찾아갔다. 하나님이 이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원주민들이 하나 둘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제 행정상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다음은 건축비, 하나님은 사방에서 재정을 보내 주셨다.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교회를 아름답게 완공할 때까지 필요를 채우셨다.

 

사람들을 보낸 것도 하나님이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이번 주에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그날 장애인 2, 알코올 중독자 2, 병든 자 2명이 교회에 왔다. 맞다. 하나님은 소외된 자의 친구였다

 

목회는 내가 죽는 것이다. 때리면 맞고, 없으면 기도하고. 여자 목사라는 이유로 부단히 업신여김을 당했지만 참고 견디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늘 새롭게 회복시켜 주셨다.

 

할머니 한 분은 교회만 오면 주무신다. 고단한 삶에 쉼이 없었다. 할머니를 모시고 속초로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수중에 돈이 없었다.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경비를 주셨다. 그 이후 교회는 매년 9월마다 속초로 여행을 떠난다. 벌써 6년째 쉼을 누리고 있다.

 

처음에는 할머니, 장애인들이 교회에 왔다. 이제는 가평 시내에서 젊은이들이 교회로 오고 있다. 교회창립 이래 유초등부가 생겨났다. 가평 시내에서 수많은 교회를 지나 산속 교회로 몰려오고 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사망이 옵니다. 씨가 땅에서 죽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자연의 섭리가 그렇고, 목회도 먼저 죽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산교회4.jpg

 

 

신금자 목사는 매일 새벽마다 시편 50, 잠언 10, 전도서를 읽는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성령의 음성을 따라 순종한다. 다른 특별한 프로그램은 없다. 오로지 말씀에 민감하고,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며 산다. 예수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평생을 이렇게 산다. 넉넉하지 않아도 목회사역에 부족함은 없다. 필요한 부분은 언제든지 공급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천국이 있는데 세상에 부러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산 순교의 삶을 삽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스물여덟 살에 하나님을 만난 신금자 목사는 벌써 칠순이 넘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예수를 이전 보다 더 신실하게 믿고 사는 것이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의 생이 향기롭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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