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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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18 09:44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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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에서 ‘외식(外飾)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이다. 영어의 hypocite(위선자)라는 단어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속이다’, ‘가장하다’라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노마이’에서 유래했으며, 연극 무대에서 대화 중에 대답하거나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 휘포크리테스는 하나님과 관계가 소원한 사람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네프’의 역어로 쓰였다. 예를 들어 욥기 34장 30절과 36장 13절에 ‘경건하지 못한 자’,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로 표현된 단어가 바로 휘포크리테스이다. 하네프는 휘포크리테스 외에도 ‘무법의’라는 뜻을 가진 ‘아노모스’(ἄνομος), ‘신이 없는’이라는 뜻인 ‘아세베스’(ἀσεβής)라는 단어로도 번역되었다. 이 세 단어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나 거짓된 입술을 가진 사람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부터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는 위선자들을 지칭한다는 면에서 의미 상통한다.
욥기 36장 13절에서는 지나치게 자만하여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자들이 만일 권세를 잡는다면 그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억압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에 대해 욥기 34장 3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이는 경건하지 못한 자가 권세를 잡아 백성을 옭아매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서에서는 휘포크리테스가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서만 등장한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의 대적자들은 마치 무대에 출연한 공연자가 연기하듯이 기만적인 술책을 숨긴 채 예수님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이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셨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자들(휘포크리테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7-9). 예수님은 이사야 29장 13절의 예언을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하시고 위선적인 종교인들과 소위 성경의 교사라고 불리는 자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남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수훈 중에도 제 눈에 들보를 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 하느냐고 책망하셨다(마 7:5).
구제 및 기도와 관련해서도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마 6:2, 5).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회당과 큰 거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상급을 받았다. 예수님은 은밀하게 하는 구제, 은밀하게 하는 기도를 강조하심으로써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이 상급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마 6:4, 6).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존중, 혹은 율법을 지키려는 경건한 태도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의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보여주기식 행위를 책망하셨다.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정작 율법의 완성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심각한 우를 범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고 실천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위선자들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경건, 전통 등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죄인들이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15)라며 강하게 책망하셨다.
위선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죄악이다. 주님이 유례없는 저주를 선포하실 정도로 위선을 미워하셨다는 점에서 이는 참으로 무거운 죄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성경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고, 자기 신앙에 유익이 되는 나름의 훌륭한 전통과 경건을 고수하는 성도들도 많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가장 하나님을 잘 알고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주님의 무서운 질타를 받았다는 점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교회 안에서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길 잃고 방황하는 세상의 영혼들 가운데로 흘려보내고, 정갈한 옷차림과 같은 보이는 경건의 모양뿐만 아니라 경건의 실제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삶, 위선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그런 참된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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