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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줌인

정의와 공의

국제신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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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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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이 하버드대학교에서 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한글로 번역되어 출판되자 8주간이나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그만큼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설령 자신이 정의롭지 않더라도 정의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는 저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여 인간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정의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에스겔서, 아모스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등을 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사회를 표현할 때 정의와 공의를 함께 언급한다. 우리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와 공의가 함께 실현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성경에서 정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מִשׁפָּט)이다. 이 단어는 심판하다, 재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샤파트(שָׁפַט)에서 파생되었다. 성경에서 400회 이상 언급되며 정의, 심판, 재판, 공평, 율례, 법도, 다스림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용례를 분석해보면 13가지로 구분되는 데 모든 용례를 관통하는 핵심 의미는 ‘justice’, 즉 사법적인 정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는 신분이나 지위,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모두가 자기의 행위대로 법 앞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공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체다카’(צְדָקָה)이다. 이 단어는 남성형 명사 체데크’(צֶדֶק)와 함께 총 274회 사용되었다. 체다카는 길고 짧은 것을 재어볼 때 사용하는 잣대를 가리킨다. 이것은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행동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따라서 체다카는 윤리, 도덕의 표준이 되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 담겨있다. 체다카를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특히 약자를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대한다. 욥은 체다카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고아를 건져내며, 눈이 보이지 않는 자를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의 부양자가 되어주었다. 성경은 이러한 욥의 모습을 내가 의(체데크)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미쉬파트)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29:14)라고 표현한다.

 

정의와 공의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율법의 핵심 사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도 그의 후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야훼의 도를 지켜 의(체다카)와 공도(미쉬파트)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8: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정의와 공의는 율법으로 이어졌다. 출애굽 이후 시내산에 도착한 모세는 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직접 율법을 수여 받았다. 출애굽기 19장부터 24장까지는 십계명으로 시작하여 노예 법,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 상해, 재산권 침해와 관련된 배상 등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정의, 미쉬파트의 율법들이 등장한다. 이어서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자들을 배려하고 돌보라는 공의, 체다카의 율법들이 나온다. 이외에도 모세오경에서 추수할 때 밭 구석구석을 다 거두지 말고 이삭을 남겨두라는 체다카(19:9-10)의 율법과 재판받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두둔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라(19:15)는 미쉬파트의 율법이 계속 등장한다. 이처럼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회의 핵심 가치이다.

 

성경은 다윗이 정의와 공의를 사회에 잘 구현했다고 말씀한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모든 백성에게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를 행할새”(대상 18:14). 다윗은 도피하는 중에도 어려운 처치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했으며 어디에 머물든 그 지역의 사람들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함으로 정의를 나타냈다. 이렇게 정의와 공의를 힘써 행했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하지만 다윗 이후, 나라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의와 공의를 상실했다. “무릇 만군의 야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5:7).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신분과 지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굽은 판결을 내리며 연약한 자를 학대하고 착취하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시고 끊임없이 제사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공의(체다카)와 정의(미쉬파트)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야훼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21:3).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물 같이, 공의(체다카)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4). 제사보다 공의와 정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0:25-37).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천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누구보다 철저히 율법을 행한다고 자부하는 율법 교사와 바리새인들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즉 정의와 공의가 없음을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은 믿고 구원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생각과 말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행함이 믿음의 조건은 아니지만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 칭의는 정의와 공의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바라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자. 그럴 때 하나님과 모든 사람이 바라는 행복하고 이상적인 정의로운 사회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정의(מִשׁפָּ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צְדָקָה)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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