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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나님의성회 자살에 관한 입장 > 정재용 목사의 하나님의성회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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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나님의성회 자살에 관한 입장 > 정재용 목사의 하나님의성회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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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나님의성회 자살에 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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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굼 작성일17-09-15 14:52

본문

 인간 생명의 존엄성:

 자살,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 및 안락사

번역: 정 재용 교수

순복음대학원대학 교수

 

 (2010, 9, 910일에 진행된 회의에서 총회 지도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낙태를 합법화 시킨 대법원의 획기적인 결정에 Roe v. Wade, 는 사람 생명의 가치를 지지하기도 하고 분열 시키는 공공 토론을 소개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보호를 철폐하면서, 대법원은 생명의 신성한 견해로부터 후퇴하고, 대신, 대중적인 표현인 선택할 권리, 아이를 낙태하려는 결정에 여자의 개인적인 자율성을 인정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후퇴는, 개인의 죽을 권리라는 원리 하에 안락사를 찬성하고, 의사의 도움으로 자살하려는 노력으로 생명을 끊는 결정에 까지 이어졌다. 1979년에 Francis Schaeffer C. Everett Koop가 지켜보았듯이, “놀랍게도 자유 결정에 의한 임신 중절은 이미 합법화 되었고, 다른 형태로 살인하는 속도가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의 의견이 채택되고 있다는 점이다”¹

 

죽을 권리 운동에는, 말기 환자들을 위한 생명 연장 기술과 부적절한 고통 경감 케어에 대해 과도하게 의존하는 진실한 관심을 포함하여, 이 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의 추진력은, 오해되고, 사람을 현혹 시키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는 사악한 철학이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종결시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반대 의견은 영적인 관계로 이해되어야만 하고 성경적인 원리에로 안내해야만 한다.

특별히, 교회는 (1)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창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해야하고, (2) 생명에서부터 죽음까지의 개념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거듭 주장해야 하며, (3)고통 당하는 인간에 대한 의미와 소망을 확실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문제 이해하기

 

먼저 우리는 윤리적인 문제인 생명을 종결 시키는 문제에 대해 논의 할 때 사용되었던 전문 용어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자살은 인간이 본인의 죽음을 주장하는 의도적이고 고의적인 행위이다. 의사의 조력 자살 및 안락사는 다음과 같이 구별될 수도 있다: “의사 조력 자살은 의사가 죽음을 위해, 일반적으로 환가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치명적인 약의 처방전 같은 의학적인 수단을 제공할 때 일어난다. 안락사인 경우, 의사는 사망시키기 위해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의료 물질로 돕는다생명 종결 의술 또는 의학 물질로 돕는 수행대리인(자신 대 타인)에 의해 구분되지만 두 가지 모두, 살인의 행위이다. 죽음을 돕는 것과 같은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한 완곡한 표현은 특별히 이런 행위들의 본래 내용들을 감추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거절해야한다. 나아가, 의사 조력 자살은 환자들에 의해 통고된 결정과는 반드시 구별되고 개인의 자유의사를 긍휼하게 존중하는 방법으로 생명 연장 처치는 거절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의 생명은 귀중하며, 심지어는 신성하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 기반을 둔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사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창세기 1: 27). 이 진리는, 인종, 사회 경제적 지위, 연령, 또는 건강 상태에 관계없이, 모든 생명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성경적 창조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인간의 생명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야 할 것이다. 우리의 존재를 개인감정이 섞이지 않은 육체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우연한 결과로 믿는 만연한 유물론자의 모델을 붙들면 생명의 가치가 상대적이고 우연한 생성물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살인을 반대하는 성경적 명령의 핵심이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세기 9:6). 인간에게 자신의 표시를 해 놓음으로써,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의 생명에 그 자신의 권한을 확고히 굳히셨으며, 그 생명을 빼앗는 자들에게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는 인간의 죄와 범죄를 위해 값을 지불하신 그의 아들의 희생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확정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피의 값으로 정당하게 사신 생명들의 주권을 주장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린도 전서 6:19,20).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는 것을 금하신 것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는 것을 금하셨다. 성경에서 살인 행위에 대해 가장 혹독한 용어를 사용하여 비난 하셨다(창세기 9:6; 신명기 5:17). 자살, 의도적으로 자신을 살인하는 행위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으나, 사울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끊고, 유다가 스스로 목메어 죽은 경우와 같이 신성한 노염을 암시하는 기록은 몇 군데 있다(사무엘 상 31:4; 마태 27:5).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살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 기준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 생명의 가치판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해 개인의 자유 의지를 견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논쟁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내 것이다:

 내 죽음의 시간과 수단은 내 사생활이다;

 그러므로 죽을 권리는 나에게 있으며, 아무도 그 권리를 내게서 빼앗을 수 없다.”³

 

개인의 주권에 대한 주장은 자유에 대한 약속을 잡고는 있지만 자기 파괴를 동반한다. 이는 사탄이 허위 논리로 이브에게 속삭이는 것을 생각나게 한다: “너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왜냐하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창세기 3:4,5). 임신 중절, 안락사, 마약 남용, 동성애 풍조, 및 이성애, 난교와 같은 하나님의 율법 범위 밖에서 개인이 선택한 어떤 행위든지 간에 불변의 결과는 육적 및 영적인 죽음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로운 결단은 진정한 자유를 선사한다. 그의 율법의 범위 안에서, 개인은 그의 축복의 기쁨을 기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완전하게 양자택일 하라고 맞서신다. “ 오늘 내가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신명기 30:19,20).

 

생명의 경계선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경계선을 정하셔서 인간이 겪는 두 종류의 깨지기 쉬운 종점을 그의 손에 들고 계신다. 그는 생명의 수태 및 생명의 결말을 출생과 죽음으로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

 

시편 작가는, 태초에,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시편 139:13, 15)라고 고백한다. 모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세공품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에서 이 땅의 각 생명이 독특한 개성, 독특한 신체적 특징 그리고 독특한 영적인 본질을 부여 받는다. 생명 공학 발전이란 시각을 통해 지켜본 이 작품들을 얼핏만 보아도 하나님의 기술에 우리들이 더 감탄할 뿐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는 수태 할 때 보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관여를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죽음으로부터 피하고 싶으며 죽음을, 마지막에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는 요구에 항복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물론, 죽음이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다. 죽음은 불순종과 그 결과로 인해 한 사람이 전 인류에 퍼뜨림으로서 들어왔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하나님의 계획은 이 마지막 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린도전서 15:55-57).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마지막 패배가 아니고 멸망할 것이 멸망 받지 않을 것으로,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으로, 완전하지 못한 것이 완전한 것으로 전환할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믿는 자들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확신을 경험한다. 욥은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욥기 14:15)라고 결론짓는다. 시편 기자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라고 지으면서 인간의 죽음과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활동이 똑 같음을 암시한다.

 

만일 수태에서 생명이 시작되고 죽음으로 생명이 끝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낙태와 자살 둘 모두는 하나님의 특권 침해를 도와주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한 것이다. 낙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생명을 모태에서 훔친 것이고 : 자살은 완결되지 않은 한 생명을 서둘러 무덤으로 보낸 것이다.

자살에 대한 논쟁 또한 생명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환점에 대한 심오한 영적인 함축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살 옹호자와 자살 행위자는 무덤 너머의 영적인 실재에 아무런 통찰력을 제안하지 못한다. 그들의 주장에는 죽음과 최후 심판에 대한 인식이 없다. 이 순진함은 죽을 권리 철학의 밑에 숨어 있는 명백한 영적인 속임수이다.

 

고난의 의미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인간의 고난에 대한 그의 적극성을 이해하는 어려움과 일치한다. 그러나 성경적 견해에서 보면, 고난은 잠재적으로 목적 있는 정련과정이다. 자살과 안락사 지지자들의 견지에서 보면, 고난은 의미 없으며 품위를 낮추는 수치스러운 것일 뿐이어서; 가능하면 피해야 하고, 몰아내야한다.

 

욥기는 고난의 표준 의미를 제시한다. 그는 고통과 심한 상처를 감내했다.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욥기 2:7).

그의 아내의 냉담한 반응은 기묘하게도 현대적이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욥기 2:9).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 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 19:25,26) 라고 말하면서, 그녀의 충고를 거절하여, 그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확증했다.

 

고난은 우리가 멸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짊어진”(이사야 53:3,4) 예수님을 바라 볼 때만이 이해가 된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이 그의 본체로 우리의 고난을 보증하셨고, 피할 수 없는 시험과 삶의 시련을 통해 우리를 보존하시기 위한 성실하심으로 확증하셨다. 이것이 모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며 혹독한 고통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유일하게 진정한 위로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당하는 인간과 동일시 하셨으며, 고통당하는 인간을 받아들이셨으며 고통당하는 인간을 치료하셨다.

 

성경적인 시각은 말기의 환자들이 자살하는 것에 대해 삶을 인정하는 쪽을 선택하라고 제안한다. 이 성경적인 견지는 두려움, 무력함, 고통, 우울, 고립 등이 실제적인 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또한 성경은, 인간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긍휼한 마음으로 개입한 가치 있는 예로, 인해 죽고 싶은 동기를 갖게 하는 심한 고통과 비탄을 경감 시킬 수 있다.

 

정서적 및 정신적 도움과 효과적인 의료를 병행하는, 호스피스 운동은, 일단 환자들의 고통과 증세가 돌봄을 받고 위로 받으면 의료 조력 자살을 요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호스피스 운동을 이끌어가는 회장은 일반인들은 사람들이 매일 (자살을 선택한다)고 인식하지만, 이런 예는 집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이고, 호스피스 도움을 받는 이들은 의미를 느끼고, 많은 의료 도움을 받아서, 죽음을 택하지 않는다라고 관찰 해왔던 점을 시사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와 의미가 인정받는 것을 원하지, 조력된 자살이 남기는 허무하다는 곳으로 피하려 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성경적 견해 또한 죽을 권리 철학에 대한 미끈거리는 논리에 저항한다. 이 논리는 생명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든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말기 환자들에게 생명의 가치는 삶의 질에 좌우된다. 그러나 건강하지도, 젊지도, 원기 왕성하지도 않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가? 말기 환자들에게 죽음을 독려가고 조력하는 것은 좀 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생명의 가치를 저하 하고 안락사의 실행을 넓히도록 인도하는 불길한 전례를 세우는 것이다. 미국 대학의 의사들은 심지어 조력 자살이 가난한 사람들, 만성 환자, 실성한 사람, 불구자, 및 아주 어린 사람들이 실행으로 옮기는 데로 이어 질수 있다는 점에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역사는 이 우려가 정당함을 증명하고 있다. 1920년대의 독일 의사들은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는 그런 것이 있다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말기 환자들을 위한 안락사 실행을 채택하여, 후에는 이전 보다 더 부 적당한사람에 대한 광범위한 분류를 묵인했다.좀 더 최근에는, 네덜란드에서는, 노인 및 만성적인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본인들이 바람으로 생명을 종식 시켜주는, 자발적인 안락사를 합법화 했으며, 이로 인해 무의식적인 안락사의 실행이 허용되도록 바로 문을 열어주는 결과를 제공했다. 이미 우리나라의 몇몇 특정 주에서는 품위 있는 죽음법은 유권자들의 승인을 얻거나 또는 법률에 의해 제정되었다.

 

한 국가로서 우리 자체 역사의 중요한 이 시점에, 성경적 진리에 뿌리 내린 절대적이고, 영원한 인간 가치의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급하다. 태어났던지 또는 아직 태아로 있던지, 어리든지 또는 나이 들었든지, 건강하든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든지 상관없이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 신성한 평가를 하는 가치관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우리 형상의 본체이고, 우리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의미와 소망을 부여하는 그 분을 생각해야한다.

 

A 기독교인의 반응

 

자살 행위에 대해 성경적 견해를 발전시키면서, 우리들의 윤리적 관심을 상응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안락사 행위에 대한 요구와 풍조의 근절을 목표로 기독교 개인과 교회에게 공동의 제안을 한다.

 

1.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자. 우리 삶의 전쟁은 자살을 추구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전쟁이 아니다. 실제 전쟁은 하나님의 왕국과 이 세상의 왕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회나 정칙적인 행동주의만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임신 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견해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기독교인은 소금과 빛이어야만 한다; 교회는 분명히 세상에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내야한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라고 기도해야한다.

 

2. 행동으로 사랑하라. 말기 환자를 지지하고 자살을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문장은, 병원 채플린, 요양원에서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 그리고 기타 고통당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호스피스 시설에서 영적 지지를 제공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권고 하듯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 13:18).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함으로 그들에 대해 높은 가치를 확실히 두자.

정신 지체 장애자들, 자살 충동을 갖고 있는 사람들 및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지자. 암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요양원에 시간을 내어 자원자로 봉사하고: 호스피스 프로그램을 지지하자. 이러한 행동은 말기 환자들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또한 강력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모델을 세운다.

 

3. 진리를 위해 다투자. 성격적 진리가 오늘날의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점을 제공하듯이 우리는 공개적으로 성경적 진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낙태와 안락사에 관련 있듯이 교회는 핵심 도덕적 가치 및 영적인 확신과 같은 양보하지 않는 용어로 표현해야한다. 우리는, 선거 기록, 낙태 합법화 반대, 조력 자살 찬성에 대해 국민투표 반대, 우리의 의사들에게 도전을 주고, 공개 토론에서 우리의 의견들을 분명히 표현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임원을 선출해야한다.

 

4. 현명하고 민감한 목회적 돌봄을 제공한다. 교회는 자살의 비극에 면역이 되지 않는다. 자살이 지나간 자리에, 가정들은 황폐되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며, 교회는 실패감과 투쟁하도록 남겨진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복음의 은혜가, 목사로, 가족의 일원으로, 친구로 지혜와 민감성을 겸한 믿는 공동체가 같이 대처함으로, 치료의 능력이 흐르기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의 주님 외에는 우울의 깊이 또는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질병이 싹 트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자살은 이유와 계획적인 행동을 수반한다. 그러나, 병적으로 우울하거나 감정적으로 균형을 잃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완전히 책임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원한 운명과 관련된 의문점은 우리들이 결정할 수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두가 사랑이시고, 영원히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다. 인간 지식의 한계와 주님의 친절한 본성을 인식하면, 교회는 깨짐과 고통 중에도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각주:

 

 ¹Francis A.Schaeffer and C.Everett Koop, “Whatever happen to the human race?” in the Complete Works of Francis A. Schaeffer, vol, v. (Westchester, IL: Crossway Books, 1984), 337.

 ²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 Ethics Manual, 4th ed, Annals of Internal Medicine(1998), 128:576-594.

 ³Nigel M. de S. Cameron, “Autonomy and the ‘Right to Die’” in dignity and dying: A Christian Appraisal(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1996),23

 J. Loconte, “Hospice, Not Hemlock,” policy Review 1998,44

 American College of Physicians Ethics Manual

 L. Alexander, “Medical Science Under Dictatorship,”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1949), 241:44

 

이 논문에서 사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New International Version의 번역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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