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에 대한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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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굼 작성일17-11-08 09:29본문
금주에 대한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
번역 : 정 재용 교수
서울중앙교회
Fair Haven International Christian Assembly 담임 목사
순복음대학원대학 선교학 교수
(2016년 8월 2-3일 열린 총회 회기 중 총회 임원들에 의해 채택되었음)
시작부터, 하나님의 성회는 분명히 알코올성 음료를 금하는 것에 명확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왔으며, 이런 확신은 포도주 남용, 독한 술 소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성경의 중요한 윤리적 사랑의 원리에도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너무나 많은 가정과 공동체에서 알코올 남용의 결과로 발생한 명백하게 잘 알려진 초토화 무기로서 절대로 간과 되서는 안 된다. 역사를 통해, 복음의 선포는 중독된 사람들을 예수의 역동적인 믿음에 참여시키고, 그들을 구원하여, 일생동안 절제할 수 있도록 돕고, 건강한 가정, 교회 및 공동체의 질을 놓이는데 강력한 힘이 되어 왔다.
안타깝게도, 우리 성회가 설립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알코올성 음료의 소비는 더 만연해져가고 있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런 세태는 지난 몇 세대에 걸쳐 음주함으로 오는 즐거움과 유익을 내세우는 알코올 산업의 막대하고 수백억 달러를 들인 과대광고의 결과이다. 오락 매체 또한 영화 텔레비전 및 기타 메디아에서 사교 음주를 자주 등장시키고 세련되게 묘사함으로 대중의 마음을 음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널리 출판된 특정한 연구(지금은 나날이 도전이 되고 있다 )는 적당히 마시는 술은 약효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처럼 보임으로 음주의 정당성을 분명히 더해왔다. 특별히 포도주는 심장에 좋은 알코올성 음료라고 장려된다. 대중은, 알코올을 소비하는 것은 수용되지 않지만,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음주 또한 옳고 좋은 습관이라고, 아마 추측할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 후에, 교계는 이런 만연하는 문화적 설득력에 크게 영향을 받아왔다. 스포츠, 회사 파티, 사교 모임, 사업상 교제, 결혼 피로연, 기타 등등과 같이 기독교인들이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는 종종 알코올이 있다.
풍성히 놓여있는 와인과 기타 알코올성 음료를 적당히 마시면서 즐거움으로 참여할지라도, 오래 전부터 지속되는 금주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은 각 세대에게 성실하게 증인이 되고, 의롭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을 해하는 파괴적인 사회적 질병과 계속해서 맞서기 위해서 성경과 사회적 실천 두 가지 요소에 비추어 금주를 재차 단언하는 것이 시급하다. 어떤 기준에 의하더라도, 알코올 사용과 남용은 계속적으로 사람, 전체 사회, 전 세계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
현대 알코올성 음료는 더 취한다.
적당한 음주를 인정해 달라는 호소가 종종 성경에 등장한 포도주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성경 시대의 생산품 및 포도주 사용과 좀 더 현혹 시키고 위험한 오늘날의 알코올성 음료의 사용간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성경에서 등장한 알코올성 음료를 사용하는 어떤 구절도 오늘날의 알코올성 음료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은 거의 없다는 점을 반드시 인식해야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주요 차이점이 있다: (1) 성경 시대의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알코올 도수가 낮다, (2)고대 포도주는 공통적으로 소비하기 전에 희석되었다, (3) 포도는 고대 농업 사회의 주요 산물 이었으며 무역을 하려면 주스의 저장을 필요로 했으며 (4) 알코올을 만들기 위한 증류 과정은 그 시대는 완전히 개발되지 않았다.
성경 시대의 여러 가지 포도주는 7-10% 알코올로 추정된다. 반면에, 현대 양조장과 증류주 양조장은 종종 각각 14%, 18-24%, 40-50%의 식탁용 포도주, 강화 포도주, 독주를 생산한다. 현대에 40%의 알코올 도수의 알코올성 음료 증류법은 중세기 까지도 발명되지 못했다. 따라서 알려져서 오늘날 소비되는 독주는 성경적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은 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묽게 한 포도주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섞이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고려되었다. 호머서 오디세이의 20:1 그리고 플리니스의 자연사의 8:1은 아마도 표준은 아니었지만 2:1 또는 3:1로 혼합한 비율이 일반적이었다. 탈무드의 제 1부를 구성하는 미슈나는 희석 비율을 3:1 로 기록한다. 초대 교회의 여러 신부들과 성경 자체는 희석된 포도주 풍습을 암시한다. 3:1의 전형적인 희석 비율로 볼 때, 성경시대의 포도주는 2-2.75 % 사이의 알코올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법적 기준에 의해, 음료가 알코올성 음료로 분류되기 이전에 3.2%의 알코올 이어야만 한다. 분명히, 성경 시대에 소비된 포도주는 현대 알코올성 음료의 효능이 결여되었다. 섞였거나 또는 희석된 포도주에 대해 성경적 또는 역사적 참고서 어떤 것도 모든 사람이 항상 그들의 포도주를 희석했다고 입증하지는 않지만, 참고 문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고 설명한다.
의학이 아직 발달 초기였으며 알코올 성분이 강하지 않은 포도주는 약의 효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상처 입은 여행자는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위에 부음”으로 치료 받았다(눅 10:34). 포도주의 치료와 소독 성은 아마도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약간의 포도주도 마시게 하려는 사도바울의 권고가 반영된다.(딤전 5:23)
그들이 생산하는 포도와 포도주는 식품과, 더 안전하고 더 맛있는 음료, 중요한 수입 공급원을 제공하는 고대 농업사회의 기본 주요산물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고대인의 삶에서는 필수품이었다. 그에 비해서, 오늘날의 알코올성 음료는, 결코 필수품이 아닌, 선택할 수 있는 기분전환용 음료이며, 안타깝게도 훨씬 더 강하고 중독성이 있다. 성경 시대에 포도주를 사용한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오늘날의 알코올음료 소비를 정당화 한다고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성서해석학적으로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성서해석학적인 고찰
현대인의 질문에 성경 말씀이 항상 구체적으로 대답하지는 않기 때문에, 신실하게 묻는 사람들이 충돌하는 질문에 맞서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원칙은 기본 질문을 묻기를 수반한다. 예를 들어, 성경 저자들이 독자들에게 말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독자들이 처음 읽었을 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무엇을 이해했을까? 오늘날 현대 문맥으로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이며 성경의 주제들과 원리들은 오늘날 어떻게 적용되고 있나?
최소한 3가지의 가능한 시나리오가 성경에 나타난 문화와 우리를 지배하는 규정이 녹아있는 우리자신의 문화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도록 도와준다. 첫째, 의문점은, 분명하게 근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이슈와 관련 있는 경우에, 성경적인 답변은 매우 분명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와 같이 성경은 절대적으로 간음을 금 한다: 시기나 문화가 성경시대가 아닐 경우 혼외정사에 대한 성경적인 규정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질문이 성경이 직접 적으로 다루는 고대 질문일 경우 대답을 적용할 가능성은 아주 쉽다.
두 번째, 의문점은, 비교적 새로운 이슈에 관한 것일 경우에 이런 의문점은 현대인에게 맞는 규정 설정을 위해 권위 있는 성경적 참조를 찾기 위한 더 큰 과제가 된다. 예를 들어, 담배 피우는 것은 오순절 교파에서는 죄가 되는 행위로 간주된다. 직접적인 성경적 금지 규정이 없을 때 담배에 대한 논쟁은 보통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곳, 또는 각종 중독은 극복해 내야할 육적인 욕망, 또는 예수 안에서의 자유란 나쁜 습관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의미와 같은, 관련된 주제에 기초한다. 이 모든 논쟁거리들은 근거는 확실 할 수는 있지만 “담배 피우지 마라”와 같은 분명한 성경적 규정은 없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지 않은 행위에 대한 의문점이 생길 경우, 성경이 뒷받침하는 일반적인 각종 주제들과 원리에서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묘하게도, 현시대의 문화가 일반적으로 인용하는 건강 우려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알코올 소비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한편 대개 담배피우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 번째, 성경 많은 곳에서 다루지만 분명한 윤리 규범 또는 지도를 제공하지 않는 풍조나 행위에 대해 지침을 요구 할 경우엔 심지어는 더 복잡한 상황이 생긴다. 따라서 성경은 포도주와 기타 알코올성 음료에 대해 많은 곳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몇몇 성경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부정하는 것 같은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적인 의문점을 갖는 사람이 그들의 성향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화제의 성경적 자료를 선택할 때 입장 충돌은 전개되고, 그들의 관점이 성경적인 해답이므로 그런 행위나 풍조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이라고 주관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적 해설과 성서해석학적인 원리는 강한 전제조건 때문에 제쳐 놓아 질 때도 가끔 있다. 성경 구절을 기반으로 하는 상반하는 결론에 직면에 있어서, 지침을 위한 좀 더 일반적인 성경적 원리와 가치를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언어 문제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어에서 다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에, 포도주의 성질과 성경 시대의 포도주 사용 및 기타 알코올음료를 이해하기 위해 본래 히브리어와 그리스 언어의 담긴 의미를 조사해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구약시대에는, 11가지의 다른 히브리 단어가 포도주로 번역되었다. 그중 7가지는 유일하게 한번 씩만 사용되었고, 두 가지는 각각 5번쯤 사용되었다. 나머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2가지 히브리 단어들은 Yayin(141번) 과 tirosh(38번)이다. 히브리 렉시콘은 Yayin을 기분 전환을 위한 일반적인 음료라고 설명한다. 이는 통상적으로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하고 종종 취하게 하는 음료와 연관되어 있다. Yayin은 나실인(민수기 6:2-4)과 수도사가 성막에서 시종 드는 동안 금하게 되어있다(레 10:9). 그 당시 Yayin은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성경은 또한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을 경고한다.
Triosh는 “신선하다 또는 새로운 포도주”로 정의되고, 포도 주스임이 확실하다. 가장 최근 번역은 대개 “새 포도주”(NIV, NASV, NET, KJV)로 되어있다. 38번 사용된 중에서 20번은 결실이 풍부함, 다산, 및 축복을 나타내는 곡물 및 기름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잠 3:10; 사 65:8; 욜 2:24). 몇 몇의 경우에 Tirosh가 포도 주스에서 예상치 않게 생긴 발효된 포도주를 의미하기는 했어도, 단어는 취한 상태와는 연관성이 없다(호 4:11 에 나타난 Yain 이 Troish 와 짝이 되어 사용된 예외 가능성). Yayin과 Tirosh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음료가 발효되었거나 아닌가는 문맥이 결정한다.
세 번째로 성경에서 알코올음료를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shekar(22번)이다. shekar가 “포도주”로 번역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보통 “독한 술 또는 맥주”로 번역된다. shekar은 또한 곡물이나 주스에서 나온 모든 알코올음료를 의미 할 수도 있다. 이 단어는 보통 Yayin과 짝하여, 취하게 하는 음료이며, 알코올 농도와 맛 두 가지가 모두 강하다. shekar를 마시는 행위는, 죽을병의 경우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 성경에서 거의 항상 정죄되었다(잠 31:6). 신14:26에서 시사한 적절히 알코올음료 마시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분명히 독한 술(shekar)소비에 대해 긍정적인 구절이다. 그 구절은 성막에 축제 방문 때 까지 연기된 11조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경우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11조를 은으로 교환하여, 그곳에서 자기들의 축제를 위해 “포도주”Yayin “발효된 음료”shekar 구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독한 술에 대한 성경의 비중은 민 28:7에서 묘사했듯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고 제주(제사에 사용되는 술)로 부을 것을 나타낸다.
신약에서 포도주로 번역되는 주요 그리스어는 oinos(34번)이다. 70인역(Septuagint, 예수 이전의 그리스어로 된 구약)은 Yayin(발효된 포도주)과 tirosh(발효되지 않은 포도 쥬스) 둘을 번역하기 위해 oinos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70인 역 구절에 기록된 여러 가지 문맥은 oinos가 발효된 또는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로 번역되어야만 하는지를 결정한다. 초기 발효 단계에서 발효되지 않은 포도 주스 또는 주스는 복음서에서는 “새 포도주”(oinos neos)(마 9:17; 막 2:22; 눅 5:37)로 정의된다. 1번 사용된 Gleukos는(행 2:13), “발효 과정 중의 새 달콤한 포도주”를 의미한다. 또한 1번 사용된 Sikera는(눅 1:15), 곡물로 만든 취하는 음료이다. “신 포도주” 또는 “포도 식초”로 해석되는 Oxos는 십자가 사건에서 6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성경 구절
여기 모두 200개가 넘는 구절에서 포도주인지 독주인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몇 개의 대표적인 구절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느낌을 알게 한다.
구약
포도주는 시편 104:14-15편에서와 같이 종종 찬성하는 것처럼 묘사되어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Yayin)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이 주제는 또한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부한 곡식과 포도주(tirosh)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세기 27:28). 또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tirosh)이 넘치리라”(잠언 3:9-10). 포도주는 기타 자연 공급 물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의 증거였다. 성경 구절에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는 성공적인 수확을 동반하는 기쁨을 반영하는 것이지, 기름과 빵에 대해 유사한 표현으로 나타났듯이 취하게 하는 알코올의 영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맥락에서 포도주는 음식이지, 취하게 하는 알코올이 아니다.
그러나 구약은 또한 이런 알코올성 음료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여준다. 포도주는 사람의 선한 평판을 변형 시키는 경향이 있다. “포도주(yain)은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독주(shekar):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언 20:1). 비슷한 구절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는 마시고 자기의 빈궁한 것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자기의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잠언 31:4-7). 이 구절에서, 주권자들은 독주를 피해야 하고, 추리에 의하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영향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이 구절은 또한 종종 한 사람이 알코올을 마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 시킨다.
술을 마시는 것은 실제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재앙이 누구에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잇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것이며 독사같이 쏠 것이며”(잠언 23:29-32). 취하게 하는 음료는, 알코올성 음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했듯이, 성경 기자는 결단코 적절하게 알코올 마시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제시하지 않는다.
신약
구약에서 언급한 것만큼, 포도주는 신약에서는 그렇게 자주 언급하지는 않는다. 복음서에서 oinos는 21번 발견되지만 겨우 13구절에서만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구절들은 구약 이후로 거의 변화가 없는 1세기 사회의 포도재배 및 포도주 소비를 반영한다. 전형적으로, 그들은 그런 행위들을 세례 요한의 금주(눅 1:15; 7:3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쓸개 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마태 27:34; 막 15:2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언급된 살균성 포도주(눅 10:34), 그리고 분명하게 종종 되풀이되는 새 포도주는 낡은 포도주 가죽 부대에서는 터진다는 비유와(마태 9:17; 막 2:22; 눅 5:37-38),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 시대의 포도주 제품과 저장에 대한 뻔한 것을 표현한다. 전체적인 인상은 생활과 상업상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포도원의 생산품을 활용하는 대부분의 농업사회이다. 그리고 종종 그 시대에 기록되었듯이, 일상적으로 소비되었던 포도주는 통상적으로 다양한 부분으로 희석되었다.
Oinon로 나타난 사건의 거의 1/3은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으로 집중된다(요2:3,9, 10; 4:46). 요한복음에서 첫 번째 “신호”인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명백하게 즉시 식수를 결혼식장에서 알지 못하는 주인이 판단한 대량의 최고 품질의 포도주로 변화시킨 것으로 표현된다. 성경은 요한복음의 2절에 나타난 Oinos의 의미에 침묵한다. 우리는 문맥상의 해석으로 보아 예수께서 결혼 손님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제조물의 포도주로 만드셨다고 믿는다.
최후의 만찬 이야기(마태 26:17-30; 막 14:12-26; 눅 22:7-38; 요 13) 또한 복음서에서 사용한 포도주를 연구하는 중요한 구절들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예리하게 관찰하는 유대인처럼,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인 유월절 행사에서 하나의 컵으로 돌아가며 마시는 포도주 시음에 참여 하셨다. 그 사건에 대해 마가가 기술한 것을 주목하라.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막 14:23). 이 후로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가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 14:25)라고 말씀하셨다. 이 경우에, 평상적인 포도주에 대한 용어인 Oinos 대신,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는 문구는 유월절 주간 동안은 누룩 또는 발효를 금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출 12:15,19-20; 13:7).
복음서에 나타난 포도주에 관한 모든 구절은 역사적인 사건 때문이거나 또는 성경 기자들이 그들의 기록에 포함하기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복음서들이 그 시기의 풍습을 반영한다고는 하나,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령하지는 않으셨다(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가르침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눅 22:17-20; 고전 11:25-26].
놀랍게도, 신약의 편지에는 포도주와 관계된 언급은 아주 드물다. Oinos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에 겨우 5번 등장하고(로 14:21; 엡 5:18; 디전 3:8; 5:23; 디도 2:3), 요한계시록에 는 8번 언급되었다(6:6;14:8,10; 16:19; 17:2; 18:3,13; 19:15). 이곳에서 13번 언급된 것 중에 유일하게 한번만 포도주의 사용이 긍정적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해서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지시한다(디전 5:23). 이 경우 Oinos는 디모데는 분명히 oinos를 마시지 않고 물(아마도 깨끗하지 않은)만 마셨기 때문에 치료 목적으로 만 마시라고 설득한다. 서신에 있는 다른 모든 술에 대한 언급은 아주 신중하다, 에베소서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엄격하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5:18a) 라고 지시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포도주(6:6) 또는 짐(18:13)으로 표현되는 포도주에 대한 2개의 확실하지 않은 구절 외에도, 포도주는 은유적으로 인간의 죄 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진노로 사용된다는 점이 아주 놀랍다. 또한 신약 전체를 망라해서 포도주에 대한 위험과 남용을 표현하기 위해 용어들에 대해 일정한 의미가 사용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신약 전체에서 “술 취함”과 관련된 8개의 다른 단어들이 발견된 다. 서로 연관 되듯이 즉시로 oinos와 연결된 구절도 있다(엡 5:18). 그러나 종종 단독으로 포도주 남용으로 기인하는 부끄러운 행위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타함과 술 취함[methe]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 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라고 경고 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methusos]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10)고 경고 했다. 베드로는 그의 일반 서신에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oinophlygia]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베전 4:3)라며, 그의 염려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분명히 예수님도 사도들도 모든 사람들이 이런 분류에 빠질 것이라고는 당연히 생각지는 않았지만, 현재는, 알코올 남용은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피해야하고 해결하기를 모색해야 할 재앙이다.
사도행전과 신약의 서신들은 초대 교회의 포도주 사용에 대해 미미한 통찰력을 제공하지만 포도주 남용에 대한 가능성에 엄청난 위험성을 표현한다. 바울은 주의 만찬을 먹을 때 취하는 고린도의 몇몇 믿는 자들을 심하게 질책했다(고전 11:20-21). 에베소서에서, 그는 또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디모데에게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사용하라”(디전 5:23)는 훈계를 적당히 마시는 것을 허락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조언은, 이미 언급되었듯이, 치료용으로 추천한 것이다. 디모데는 아마 지역의 물 또는 기타 비 알코올성 음료( 십중팔구 그렇게 깨끗하지 않은)만 마실 확률이 높다. 그의 위장을 위해 약간의 포도주를 마시라고 격려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의 식 생활 문화는 일상적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몇 가지 기본적인 결론
금주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역사적인 의지는 성경적 및 윤리적으로 잘 뒷받침 되어 있다. 본 논문은 성경 구절들이 분명히 알코올 성분이 높은 음료로 규정한 것에 대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함을 입증한다. 성서 시대의 가능한 가장 독한 술은 40-50%의 알코올 농도의 버본 위스키나 데킬라 보다는 훨씬 낮은 도수로, 현대의 14-20 % 알코올 농도의 강화포도주는 아니었지만, 자연적으로 발효된 최고 10-115의 알코올 농도의 포도주나 맥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높은 알코올성 음료는 히브리 단어로 shekar로 정의 되었는데, 독한 술이라는 의미이다. 포도주(yayin)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또한 shekar과 짝이 되어 사용되었거나 알코올 농도가 분명하게 눈에 들어 올 때 그러한 음료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잠언 20:1; 23:29-33; 31:4-7). 성경의 경고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낮은 알코올 성분으로 분류된 음료를 생산하는 발효된 포도주를 희석하는 일반적인 절차를 통해 조심스럽게 관찰될 수 있다. 오늘날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약한 포도주나 주류는 성서 시대의 “독주” 보다 알코올 농도가 더 높다: 그러므로, 성서적 사례는 현대 알코올 성 음료를 적당하게 마시는 것 조차도 강하게 반대한다.
우리 모두 동의 하듯이, 성경에서 술 취함은 늘 비난 받았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와 그의 아들들의 이야기(창 9:20-27), 롯과 그의 딸들(창 19:30-38)은 생생하게 술 취함이 종종 비극적인 종말로 인도함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독주를 따라가는 사람들과 포도주에 취해있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셨다(사 5:11, 22). 사도 바울은 술 취함을 “육체의 행위”로 기록했으며 술 취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 했다(갈 5:19-21; 고전 6:9-10).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에 그들 중 몇 명은 술주정뱅이 이었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상기 시켜 주었는데, 이는 그런 행위가 구원 받은 후에 사라졌음을 암시하고 있다(고전 6:11). 사도 베드로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과 이전에 취해서 “방탕한 삶”으로 달음질 했던 때를 대조하고 있다(베전 4:3-4). 하나님께서는 술 취함을 결코 승인하신 적이 없으시며 이는 항상 알코올 소비의 잠재적인 결과이다.
알코올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성경이 분명히 경고하는, 특별한 위험성이 있다. 알코올은 사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잠 32:4-5). 종종 재앙, 슬픔, 분쟁을 불러오며(잠 23:29), 신체적인 손상의 원인이 된다(잠 23:29,35). 억제력이 낮아지고, 부끄러운 행위로 이어지고, 말을 어눌하게 하고, 난교 및 폭력(잠 20:1; 사 5:11; 로 13:13)을 초래한다. 알코올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방해물이며, 속이는 물질이다. “부드럽게 내려가나”, “결국은 뱀같이 물것이며 독사같이 쏠 것이며”(잠23:31-32). 너무나 현혹 시켜 사람은 처음에는 그 술이 사람에게 손상을 주는 줄도 인식하지 못한다(잠 23:35).
성서가 동의하듯이 금주하는 다양한 개인과 그룹들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한편, 성경은 특별히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높은 수준을 설정한다(사 12; 렘35).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는 동안 포도주 마시는 것에 대해 분명한 금지령과(레 10:8-9),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나실 인의 맹세와(사사기: 13), 레갑인들의 전통(렘 35), 그리고 세례요한의 예 및 디모데- 모두는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심오한 영적인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금주는 전체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과 관련 된다: 거룩한 사역자의 소명에 관계된 사람들은 특별한 의무감의 모범을 짊어져야한다. 디모데와 디도 같은 바울의 동역 자들에게 장로 임명에 대해 가르치면서, 바울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술을 즐겨하지 않아야 한다고 둘에게 강조했다(디전 3:3; 디도 1:7).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명사는 paroinos로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사람” 즉 “술 중독” 또는 “술고래”를 의미한다. 분명이 이 분야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주 많이 훈련해야 되고, 모든 믿는 자들이 따르고 믿지 않는 자들이 존경해야할 모범을 보여야 한다.
적당히 마시는 포도주 : 정의하기 어려운 기준
적당함은 종종 포도주 섭취를 표현하는 성서에 대해 적절하고 모두가 원하는 현 시대의 반응으로 소개 한다. 그렇지만, 신약은 적당하게 마시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 또한 신약에는 적당한 정도로 마신 것을 마신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 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적당함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없으며 따라서 이 용어는 극히 주관적이다. 한 사람이 적당하다고 여기는 정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과음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에메 모호함을 설명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적당히 마신다는 정의는 한 남성이 일주일에 12잔에서 14잔(여성인 경우 9잔) 마시는 것으로 연구진들은 규정하는데, 혈중 알코올 농도가 최고 0.055까지인 상태를 말한다.
심지어 좋은 의도로 좀 더 훈련되어 적당히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각 사람은 알코올에 대해 다르게 반응한다. 취하는 것에 대한 법적 제한 혈중 알코올 농도(BAC)가 0.08이라고 해도 0.02의 낮은 BAC 상태로도 다양한 양상의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알코올은 사회적으로 선택이 수용되는 음료일 수도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은 중독성을 갖고 있다. 해병대 보건소는 “알코올 중독은 당신이 마실 때 마시는 빈도나(얼마만큼) 마시는 양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마심으로 발생하는 문제의 결과로 규정된다”고 지적한다. 과도하게 술을 마신다고 해도 나쁜 결과를 유발시키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몇 잔만 마셔도 과해서 중독으로 이어 지는 사람도 있다.
유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알코올 중독에 대한 유전적 성향 또한 명심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도 있다. 알코올 남용 및 중독 국립 연구소(NIAA)는 다양한 요인이 중독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대략 알코올 중독 위험률의 절반 정도가 유전 인자로 기인한다,”고 제시했다. 적당히 마시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중독의 위험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들이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순진함이 있다. 아무도 알코올 중독으로 시작은 하지 않는다. 성경 또는 어디에도 중독에 대해 믿음이 가는 정의는 없으며, 사람들은 술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지 않고, 쉽게 적당히 마시다가 극단적인 술꾼이 되가는 것이다. 보고에 의하면 51%의 미국 성인이 정기적으로 술을 마시며 (급격히 증가하는 미성년 음주자 제외), 3800만 이상이 매달 4번 정도 폭음한다. 소수가 문제 음주자로 시작은 했을지라도 알코올 섭취는 사실 구렁텅이로 빠지는 길이다.
기독교인의 자유 및 “적당주의”
적당한 음주를 옹호하는 자들은 종종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명분 아래 적당하게 음주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고전 6:12; 10:23) 두 번이나 우리에게 깨달음을 촉구한다. 행위에 대한 우리의 선택은 단순이 허락되었다는 것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고, 행위가 덕을 세우느냐에 근거한다(데전 5:11).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싶다고 주장하는 지식 때문에 자기들이 영적이라고 생각했으며. 믿는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행위에 대한 토대로 그 지식을 소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러한 지식들이 “증식”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떤 때는 지식이 “우쭐거리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들을 파멸 시킨다. 영적으로 변하시키기는커녕 지식은, 죄성의 교만으로 인도한다. 기독교인의 사랑에 대한 윤리는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세우는“데 있다”고 말했다(고전 8:1-11, 빌 2:1-5).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 또한 세운다.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롬 12:10)하는 즐거움을 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선한 일을 하고 영적인 성숙함을 보여주기 위한 자유이다.
가족사랑
사랑은 가정생활을 강화하고 활기를 띠게 한다.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은 사도 바울이 그 사랑을 가정에 적용한 가정의 머리에 대해 권고 했듯이 성령으로 이끌림을 받는 삶의 기준을 정했다(엡 5:18-6:9). 그 후에, 다른 성경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은 “먼저 자기 자신의 가족을 사랑함으로서 종교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것을 배우라”(딤전 5:4)고 덧 붙였다.
특별히, 사춘기 초기에 음주를 시험하려는 동년배들의 압력을 겪은 자녀들은 “알코올에 대한 그들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부모님의 애정 어린 따뜻한 영향력이 필요하다. 보고에 의하면, “부모님이 교제상 술을 마시는 가정의 자녀들 중 66%가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알코올을 경험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알코올 중독자인 가정의 자녀들은 훨씬 더 알코올 남용으로 시련을 겪을 가능성이 크며, 그들 자신도 4배 이상 알코올 중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더군다나, 알코올을 포함하여 어떤 종류의 중독성 있는 물질을 이용하기 시작한 4명 중의 1명의 아이는 18살이 되기도 전에 이미 중독이 된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다. 아이들은 알코올에 대한 부모님의 충고보다는 부모를 따라 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1). 로마 교회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허용되는 것에 대해 개인이 깨달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깨달음으로 다른 형제자매가 걸려 넘어지는데 원인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기 위해 무려 거의 3장이나 써내려갔다(롬: 14, 15; 고전: 8). 사도 바울 시대의 환경이나 쟁점은 현재 우리의 것들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형제자매를 위한 헌신적인 사랑의 관계에 대한 원칙은 똑 같다. 교회에는 알코올성 음료를 마시는 것이 죄라고 믿고 있는, 적당히 음주하는 사람으로 인해 실족된 사람이 꽤 많다. 또한 존경하는 성도가 의도하지 않게 그들에게 해가 되고 파멸 시키는 적당하게 마시는 예를 따름으로 위험에 처할 사람도 있다. 그리고 여전히 적절하게 마시는 풍조가 그들을 자기 자신이 더 어렵게 알코올과 씨름하게 만듦으로 실족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형제자매들을 지키는 사람이기에 사랑은 항상 승리한다.
교회 사랑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교회가 시작 될 때부터 교회는 화합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행:2). 가장 혹독한 몇몇의 성경구절은 자기 자신들의 욕망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믿는 자들 간에 분열을 야기키는 것에 관해 기록되었다(롬 16:17-18).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의견은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규정으로 특별한 문제에 관해 교회의 관례를 만들기를 제시했다(고전 11:16). 같은 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성찬 예식을 손상하며 같은 성도를 업신여기고 부끄럽게 하는 음식과 알코올의 경멸적인 남용을 심하게 꾸짖었다(11:21).
교회는 영원한 과제를 다루는 공동체이다. 우리는 성경과 관례적인 경험으로부터 금주에 대해 꾸준히 배워 온 100년의 전통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들 중에 알코올 중독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수많은 개종자들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남긴 끔찍한 결과를 쉽사리 망각한다. 개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는 대신 “그럼으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써야한다”(롬 14:19-20).
사회 사랑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로부터 직접 흘러오는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마 5:13-16).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또한 의롭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많은 방식으로 깨닫게 한다. 바울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자”(갈 6:10)고 교훈했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베전 2:12)라고 덧 붙였다. 책임감 있는 성도 및 건강과 치료의 대행자로서, 우리는 알코올성 음료(기타 잠재적으로 해로운 행위) 음주가 우리 사회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한다.
대략 1700만의 미국인들이 NIAA가 지정한 “알코올 사용 장애”를 갖고 있다. 2010년에는 미국 사회의 알코올 남용 문제로 연간 2490만 달러의 비용이 사용되었다고 추정한다. 매년 약 88,000명의 즉음이 알코올과 관련된다. 매일 알코올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운전사로 인해 30명 정도가 사망에 이른다. 이는 48분 당 1명이 사망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알코올은 매년 발생하는 300만의 폭력 범죄의 40%에 달하는 요인이다.
알코올은 우리 자녀들에게 치명적인 위험 요소이며 대학 캠퍼스에 악이다. 매년, 18세에서 24세에 이르는 1.825 학생들이, 자동차 충돌 사고를 포함하여, 알코올과 관련된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한다고 추정된다. 거의 700,000 학생들이, 거의 100,000건의 알코올과 관련된 성 폭행과 데이트 상대에게 성 폭행을 포함하여, 다른 학생들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 미국에서는 알코올로 기인하는 자살률이 10위이며(15세-24세는 3위) 1/3은 알코올 양성 반응으로 나타났다. 39%의 고등학생들이 정기적으로 음주하고 10명 중의 1명의 상급학생들이 극단적인 폭음을 한다. 10대들의 알코올 남용은 건강한 두뇌 발달을 손상 시킬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현 시대에는 알코올이 담배, 마리화나 및 기타 합법 및 불법 약물로 이어지는 초기 약물로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 사랑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고 말씀하셨을 때 건강한 자기 사랑을 가르치셨다. 의식적으로 방종한 나르시시즘을 거부하는, 성도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새기면서 그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삶을 육성해야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령의 전이며 도구이다(고전 6:19; 롬 6:13).
그러므로 “성도들의 개인적인 건강과 기독교인이 봉사를 위해 알코올 사용( 및 기타 삶의 방식을 탐닉하게 하는 중독성의 행위 )의 결과가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알코올성 음료의 음주는 중풍, 고혈압, 심장병, 췌장염, 간질환, 면역 시스템 장애, 및 각종 암들을 포함한 질병과 결부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낙관적인 사람들은 적당하게 음주하는 사람들이 알코올이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만 꽤 조심한다. 예를 들어, 적당한 음주의 한정된 이득을 인식 하는 한편, 하버드 공중 건강 연구소 또한 “알코올의 어두운 부분”을 다루면서 “만일 음주 하지 않는다면, 시작할 필요가 없다. 운동(만일 시작하지 않았다면, 운동을 시작하고 이미 시작 했다면 강도와 운동 시간을 늘려라 )과 더 건강한 음식을 섭취함으로 비슷한 이득을 볼 수 있다 ”고 시사했다. 또한 적당한 음주로 기인한 한정된 이득을 지적한, 마요(Mayo)진료소는 “분명히, 당신은 어떠한 알코올도 음주 할 필요가 없으며, 만일 요즘 음주하지 않았다면 가능한 건강 이득을 위해 음주를 시작도 하지 마라. 몇몇 경우는, 음주로 인해 가능한 이득 보다는 위험성이 더 크기 때문에 알코올을 전적으로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라고 시사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펄리먼(Perelman) 의과대학에서 공동으로 진행한 알코올이 심혈관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한 좀 더 최근의 이례적인 종합적인 국제 연구 결과는 적당한 음주로 인한 한정된 이득에 도전장을 던졌다. 수석 연구원 중의 한명은 “지금가지 나타난 연구 보고서와는 반대로, 최근에는 어떤 종류의 알코올에 노출되면 심혈관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정신적 감성적 우려에 신체적 위험이 더해지는데, 특별히 우울 증세이다. 적절한 음주를 시작한 개인은 어느 분야에 알코올이 영향을 미칠지 전혀 알 수 없다.
금주와 영성 형성
우리 인생의 선택을 인도하는 성경에는 태도와 행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윤리적인 원칙이 있으며, 우리가 믿기로 성경은 기독교인을 금주로 인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 영성 형성의 모든 단계를 보급하는 윤리적인 원칙의 기초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알코올 사용과 남용에 대해 폭 넓은 범위의 영향이 주어졌다면, 개인의 영성 형성에 더 크게 부각되는 몇 가지 논쟁거리가 있다. 믿는 자들이 금주를 하든지 적당하게 음주를 하든지는 고대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성경 구절에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알코올 섭취에 대한 분명하고 더 대중화된 위험뿐만 아니라, 알코올 섭취의 위험에 대한 성서적 경고를 생각해 볼 때,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자신의 동기와 태도를 검토해보아야 한다. 적당한 음주가 정말로 성숙한 영성과 성경이 교훈하는 증인된 삶에 참여하는데 기여하는가? 음주가 믿는 자들의 개인적인 사생활을 향상 시키는가? 공개적으로 위험성을 인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알코올 성 음료의 값을 고려해 볼 때, 그 비용이 기독교인의 청지기 삶에 현명하게 적용하는 것인가?
금주에 대한 단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을 생각조차도 하지 말라”(롬 12:2). 절제한다는 의미는 멀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는 명령이 아니고 선택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은 “기독교인이 음주 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음주해야하나?”이다.
금주는 성경적 선택이다. 성경은 분명히 알코올성 음료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며 성경이 명백하게 기술한 높은 알코올성 음료 섭취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시사했다. 성경의 이런 경고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심장 고통, 불행과 파멸로 이어진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무익한 방종은 개인, 가족,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가 받아들기 힘든 결과로 치닫게 한다. 적당한 음주는 사적인 즐거움을 손상시키지는 않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금주는 현명한 선택이다. 알코올 중독의 비극적인 결과는 첫 번째 음주를 시작도 하지 않은 개인에게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알코올 음주가 있는 장소는 피해야 하며, 취중의 실수는 가족을 멀어지게 한다. 금주를 가르치고 실행하는 교회는 긍휼한 마음으로 알코올에 의한 모임에서 교인들을 구조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잠재적인 위험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해야한다. 예방이 치료보다는 항상 더 났다.
금주는 도덕적 선택이다. 금주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개인을 보호하며, 공동체의 기독인들을 존중하며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화합시키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를 축복한다. 금주는 직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영한다. 금주는 도덕적인 율법이 아니라 기독인들의 제자 도이며, 이는 본래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자기 부인을 수반한다. “근본적인 민감성은 당신의 이웃을 돌보고, 선한 모델이 되려고 노력하는, 가족을 돌보며, 인생의 방해물이 결코 되지 않는다.” 금주는 율법주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사랑에 대한 도덕적인 속성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회는 금주에 대한 입장을 재 확언한다. 본 입장은 우리의 전 공동체에 과감하고 분명하게 선포되어야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겸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사역으로 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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