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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선교에 있어서 문화 > 정재용 목사의 하나님의성회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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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선교에 있어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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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굼 작성일18-06-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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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있어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선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많은 갈등은 칼 바르트가 계시와 문화의 관계는 넘어설 수 없는 거리라고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구 신학에서 19세기에 개신교가 복음과 문화의 차이를 거의 균등하게 여겼고, “문화선교”란 용어가 강력한 비판을 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을 뛰어 넘어서 문화와 복음의 사이를 좁히는 선교적 용어가 처음으로 나온 것은, 19세기부터 1960년대까지 토착화(Indigenization)였고, 1970년대에 복음주의 성향에서 사용된 상황화(1970년대, Contexturalization)이며, 가톨릭에서는 문화화란(Inculturation)란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 용어적 견해와 차이가 다르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은 전하는 자의 옷을 입고 수용자는 그들의 옷을 입으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말이다. 말은 쉽지만 이런 과정 속에 나타나는 혼합주의적 성향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수 있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선교학에서 복음과 문화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들은, 복음은 문화에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조건적 관계이며, 복음은 문화의 형태로 전달되고 수용되며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 전파자와 수용 과정에서 각자의 문화적 조건과 영향을 벗어나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안경(세계관)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문화적 안경을 벗어나서 복음에 전급할 수 없다고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주장하고 있다. 곧 세계관에 따른 복음적 해석이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폴 히버트는 인식의 과정에서 문화를, “관념과 감정과 가치의 통합된 체계 및 이와 연관된 행위의 형태와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것을 조직하고 규칙화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의하여 공유된 산물”이라 정의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문화와 복음의 상호 관계에 대한 연구는 선교에서 복음에 대한 올바를 이해와 한 문화권에서 적응 과정을 바르게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요, 불가피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한다면, 성경이 기록되어 가는 과정에서 결국 문화적인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인 배경과 복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선교학에서 복음과 문화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들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오순절 관점에서 이러한 문화적 이해를 뛰어 넘어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 선교학적인 이해는 없을까이다. 필자의 고민 가운데 나온 용어가 성령의 위임된 능력 안에서 변화(Empowered Biblical Transformation)이다. 이 좁은 공간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성령은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능력이다. 곧 내재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문화를 변화(중생)시켜 나가고 하나님 나라로 변화(성화) 시켜 하나님의 의로 다스리게 하신다. 이것은 바울이 타락하여 가는 고린도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전6:11)다 선언하고 있다. 곧 복음의 본질, 선교의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을 오순절 관점에서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미 이 땅에 이루어졌지만 아직 이루어야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고린도교회에게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9)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타락한 문화가 중생하지 않는 다면, 성화되어 변하지 않는 다면 결코 하나님의 의 앞에 온전치 못한 세상 문화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착각하고 사는 것은 문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과 성화가 없는 문화는 단지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고 인간의 불의에 항상 지배받는 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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