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따라 걷는 순례자의 제단 (창 12:4~5)
김유배 목사(서울강남지방회장, 등대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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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6-10-19 13:32본문

인생을 흔히 나그네 길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 이 길은 발길 닿는 대로 표류하는 방랑이 아니라, 푯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순례자의 걸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순례자인 우리는 무엇을 나침반 삼아 걸어가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명을 품고 날마다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제 마음은 유년 시절을 보낸 고향 땅, 전라남도 신안군의 작은 섬마을로 향하곤 합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마을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태어나 숨 쉬고 뼈를 묻는 삶의 전부이자 가장 든든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런 고향을 등지고 육지로 향한다는 것은 익숙했던 삶의 터전을 전부 내려놓는 모험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에서 칠십오 년의 세월을 보낸 노인 아브람에게도 고향은 바로 그런 곳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아브람의 소명은 수천 년 전 한 족장의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 사역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우리 심령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마주해야 할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인격적인 1대 1의 자리로 부르셨고, 그 부르심의 자리는 언제나 두 가지 명령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떠남’과 ‘나아감’입니다.
신앙의 걸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데서 출발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애쓴다고 해서 믿음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아브람이 하란의 익숙함을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까닭도 분명했습니다. 그는 책 속에 갇힌 문자가 아니라, 자기 심령을 흔들어 깨우고 두려움을 이길 힘을 주는 살아 있는 레마(Rhema)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을 향해 직접 말씀하시는 그 언약의 소리를 들었기에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장막을 걷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처음 던지신 말씀은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원리는 세상과 달라서, 손에 쥔 것을 비워내지 않고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 은혜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시기에 앞서, 그동안 안주해 온 삶의 자리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본토를 떠나라’는 것은 내 생각과 자아를 앞세우던 삶의 방식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땅과 재산을 가장 든든한 기둥으로 여깁니다. 아브람의 이동은 단순히 이웃 동네로 이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다른 낯선 이국땅으로 삶의 자리를 송두리째 옮기는 이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 세대의 물결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내 안의 밑바닥을 말씀 앞에 쏟아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 고집을 비워낼 때 비로소 남을 품고 희생하는 섬김의 기쁨을 배우게 됩니다.
‘친척을 떠나라’는 명령은 인정(人情)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해서 혈육의 정에 쉽게 마음을 기댑니다. 낯선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 역시 외로움과 향수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애틋한 인정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정에 휘둘리다 보면 가야 할 신앙의 길을 놓치기 쉽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보다 앞서는 세상의 인간적인 관계망을 과감하게 털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우상과 세상 풍속을 끊어내라는 부르심입니다. 아브람의 부친 데라는 우상을 만들고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그동안 의지해 온 세상의 명예와 물질, 헛된 안식처를 모두 뒤로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성경이 경계하는 우상은 거창한 신상만이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의지하는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이 떠남의 요구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라는 뜻이 아니라, 땅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비워냈을 때 비로소 두 번째 부르심인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순종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순간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 말씀을 따라갔다는 것은 하란을 떠날 때 단 한 번 결단하고 말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거칠고 막막한 광야 길을 걷는 내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나침반으로 삼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발걸음을 맞추어 나아가는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 다루듯 일방적으로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격을 존중하시며,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빚어가십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억지로 끌려가는 종의 걸음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신 비전의 설계도를 마음에 품고 기도로 하루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자발적인 동역입니다.
창세기 12장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가슴을 울리는 움직임의 표현들이 줄을 잇습니다. “따라갔고”, “떠났고”, “들어갔더라”, “지나”, “옮겨”,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하나님은 아브람을 한곳에 안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장막을 옮기게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안락한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쉼 없는 순례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곧바로 시련 없는 꽃길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낯설고 고단한 광야를 마주할 때마다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도,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도 장막을 치기 전에 먼저 예배의 자리를 폈습니다. 엎드려 부르짖는 예배가 있었기에 하늘의 위로와 새 힘을 얻어 거친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히브리인의 조상’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본래 뿌리는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유브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 그 땅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저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 불렀습니다.
세상의 안락한 터전을 뒤로하고, 믿음으로 강을 건너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발을 디딘 사람이 바로 영적 히브리인입니다. 칠십오 세의 늦은 나이에도 자기 경험과 고집을 내려놓고 말씀에 순종했기에, 아브람은 마침내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순종의 걸음은 아들 이삭을 거쳐 야곱으로 이어졌고, 생의 마지막 순간 애굽이 아닌 약속의 땅에 뼈를 묻어달라던 요셉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길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길은 변함없는 ‘순종’에 있습니다. 눈앞의 상황과 계산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순간을 만날지라도, 내 자아의 본토와 옛 삶의 아비 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하란에 안주하던 마음을 털고 일어섭시다. 주님이 가리키시는 푯대를 바라보며 믿음의 보폭을 넓혀 나아갑시다. 삶의 구석구석마다 무너진 기도의 자리, 감사의 제단을 다시 수축합시다. 오늘도 신실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말씀과 함께 걸어갈 때, 마침내 약속의 가나안을 밟고 승리하는 거룩한 순례의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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