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설교의 흐름(Ⅸ)
조지훈 교수(한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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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4 08:3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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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가진 이야기성의 재발견
권위에 대한 도전을 극복하려는 노력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효과적인 설교 강구
설교자라면 누구나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길 소망한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성경에 대한 깊은 묵상과 연구, 철저한 원고 준비, 준비된 원고의 정확한 전달 등등 설교에는 다양한 활동들이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설교 이론과 방법론이 계속해서 연구되고 개발되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교 이론을 소개하고 설교 방법론을 제시하는 글을 연재한다. 목회 일선에서 오늘도 설교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설교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주>
새로운 설교학이 등장하게 된 두 번째 원인으로 성경이 가진 이야기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들 수 있다. 성경의 기본적인 형식은 이야기(narrative)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설교자들은 성경이 가지는 이야기성을 주목하지 않았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야기는 교리와 더불어 기독교의 진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복음서를 비롯해 고대교회에서 등장했던 많은 작품 역시 그와 같은 사실을 증언해준다. 교회는 성경이 가지는 이야기성을 사장하지 않았던 것이다(Paul Scott Wilson, Imagination of Heart, 154-155).
그러나 3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교회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결국은 거의 사라지게 된 것이다. 김운용 교수는 그와 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어거스틴이 설교학에 수사학적 개념을 받아들인 이후 성경의 주해적인 방법이 중심적인 형태를 이루면서 네러티브의 요소는 사라지고, 연역적인 형태와 이성주의에 고착”되게 되었다(김운용,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123).
교회가 이야기성을 상실하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① 이단과의 논쟁이다. 교회는 이단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 이야기보다는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특히 고대교회에서 이야기를 영지주의자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Paul Scott Wilson, 156). ② 헬라철학과 수사학의 영향이다. 교회는 헬라문화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헬라철학에 근거한 설교가 도입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교회에서는 점차 이야기가 사라지고 교리를 중심으로 한 사변적 설교가 득세하게 되었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성경이 가지는 이야기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리처드 니버, 한스 프라이, 스티븐 크라이테스 등 많은 신학자의 공헌이 크다. 이들은 ① 신학을 하는 데 이야기가 가지는 중요성을 발견했고, ② 성서해석학에서 이야기가 회복하는 일에 힘썼으며, ③ 인간의 경험이 이야기성을 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④ 복음의 기본적인 특성이 이야기임을 이해했다(김운용, 124). 결국 “이야기 신학은 단지 스토리텔링(storyetelling)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성경과 전승의 내러티브 안에서 이야기된 특별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둔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런 이야기의 재발견은 “설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게 만든 동인”이 되었다(김운용, 124-125).
셋째, 새로운 설교학이 등장하게 된 것은 설교 현장의 상황 변화 때문이었다. 설교의 3요소인 설교, 설교자, 청중 중 하나의 요인이 변하게 되면 설교 이론과 설교 방법론 역시 변하게 된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등장하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미국은 엄청난 변화의 상황 가운데 놓여있었다. 김운용 교수는 그와 같은 변화를 기술의 놀라운 발전, 커뮤니케이션 혁명, 과학적 낙관론의 쇠퇴, 모더니즘의 붕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 등이라고 열거한다(김운용, 125).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와 설교자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권위’와 관련된 변화였다. 전창희는 당시 교회와 설교자의 권위가 회중들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젊은이들은 대학 총장실을 점거하고, 기성세대의 결정에 대해서 반발하며 거부하고, 자신들의 읜견을 전통적 권위 앞에 강하게 개진하고 있었다”(전창희, “설교학에서 ‘이야기’의 등장과 발전에 관한 연구”, 166).
이와 같은 시대적인 변혁 앞에서 교회와 설교자의 변화를 촉구했던 프레드 크레독의 책 제목이 『권위 없는 자처럼』(As One Without Authority)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의 원인 중 하나였으며 지금도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포스트모던 세계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이번 호의 연재를 마감하도록 하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6세기 계몽주의 이후 등장한 모더니즘의 반발로 시작됐다. 중세를 암흑과 야만의 시대로 정의하는 모더니즘 시대는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신’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천명하면서 “인간의 이성이 모든 가치 판단과 규범의 기준”이며 성경과 교회와 신학보다 이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김창훈, “포스트모더니즘과 설교”, 275-276).
또한 모더니즘 시대에는 과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거대담론(meta-narrative, 우주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커다란 질서)을 인정했다. 이 시대는 이성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고 인간의 과학적 발전을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성과 과학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 인간들에 의해서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적인 낙관론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고 동구권 공산사회의 붕괴는 인간 이성과 과학이 갖는 한계와 부작용 역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를 표방한다. 이 세상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진리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갖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주의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객관적 과학주의를 반대하며,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원칙이나 목적은 서로 다르며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덕목은 ‘관용과 여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감성주의를 선호한다.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지배되어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김창훈, 280).
이런 특징들을 근거로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혼합주의이다. 혼합주의의 다른 말은 ‘탈장르화’로, 특정한 장르가 파괴되고 이질적인 장르들이 혼합되는 현상이다. 남녀의 구별을 지양하는 ‘유니섹스’, 팝과 오페라를 결합한 팝페라, 동서양 음악의 혼합인 퓨전 음악 등이 혼합주의의 특징이다. 이처럼 포스트모던 세상에 대한 응전으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 발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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